희랍을 다룬 책을 몇 권 주문하면서 이디스 해밀턴의 책도 추가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절판된지 제법 되었던 책이 다시 나왔길래, 출판사가 재계약해 다시 낼만큼 눈여겨볼만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한편으로는 입문서로 자주 권해지는 키토를 대신할만한 책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엊그제 도착해서 오늘 밤에 찬찬히 넘겨보았다. 결론부터 말해, 다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책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고전학 책은 (서구에서) 당대 최고의 저자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영역이고, 본인의 서술을 첨가하려면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이 영역에서 책을 내는 저자라면 수준급의 저작과 비교평가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게 보면 평정한 책이다. 지성사/문화사 분야에서는 키토의 책보다 떨어지고, 사..
세월호 참사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나는 SNS에 인문 사회 신간 서적을 스크랩해 두곤 해서 종종 책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회의적인 어투로 쓰인 장문의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질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저도 한때는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공허할 뿐입니다. 역사, 철학, 인문학, 민주주의에 대한 몇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는데 무엇을 기여했나요? 박제되고 삭막한 원칙 몇 개와 개념정의 따위로 어떻게 참사를 막고 우리 삶을 바꾸나요? 그런 것에 탐닉하느니 차라리 수구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 이 사회에는 더 도움이 될 거 같군요.” 이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책을 읽는 것이 항상 세상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
언젠가부터 내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는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편,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어느 다른 시대의, 혹은 어느 다른 나라의 어설픈 복사본이거나 덜떨어진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퇴근길에 호퍼의 책을 펴다 8월 10일. 독서를 포기했다. 대낮의 온도가 33도에 육박하고, 서재는 그보다 5도쯤 더 높았으며, 책을 펼쳐드는 순간 이마에서 땀이 굴러 떨어지는 환경에서 책읽기는 불가능했다. 당시 내 손에는 막 출간된 바우만의 책이 들려 있었고, 난해한(최소한 난삽한) 그의 서술은 책장을 넘기는 것을 고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땀이 책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눈에 흘러들어가는 지경에 이르자 그렇잖아도 빈약한 인내심이 바닥나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 서재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서점은 피해야 할 장소가 되었다. 책과 멀어지는 것으로 반강제적인 피서를 보냈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퇴근길의 읽을거리로 고른 책은 (에릭 호퍼, 정지호 역, 동녘, 2012)였다. ..
날씨가 너무 덥다. 여름은 이제 겨우 초입을 지났을 뿐인데, 폭염에 몇 달은 시달린 느낌이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7월 초. 더위를 쫓겠다며 햄버거 집을 찾아가 팥빙수를 시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손가락을 들어 휴가까지 남은 일수를 세어본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서른 둘… 멈춘다. 그러니까 징그럽게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인상 쓰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 대체해보자. 가령 책은 어떨까? 망측하게도 책은 우주를 여행하게 해 준다. 이를테면 피서용으로 한 번쯤은 선택하는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권진아 역, 책세상, 2005) 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자. 오늘은 누구나 다 가는, 끔찍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