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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의 눈물>>(올리비아 비앙키, 에두아르 바리보, <<헤겔의 눈물>>, 김동훈 역, 열린책들, 2014)은 추상성을 제거하고, 헤겔에게 피와 살을 되찾아 주려는 시도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의 학>>을 가급적 덜 인용하면서, <<정신현상학>>과 <<역사철학강의>>를 뼈대로 삼아 역사를 실현하는 주체의 여정을 조망한다. 저자의 의도는 찾기 어렵지 않다. 첫 페이지만 넘겨도 독자는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된다.

“…헤겔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개념들을 고안해 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사상가였다. 생전에 헤겔은 자신이 철학자이기 이전에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본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살과 피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p15, 강조 인용자)

그렇다면 육신을 되찾은 헤겔은 어떤 철학자일까. 올리비아 비앙키는 다음의 관점을 견지한다. “헤겔은 자기포기가 아니라, 자기실현의 철학자였다.”(p15) 오직 그 뿐인가? 아니다. 헤겔은 웰빙의 철학자다. “오늘날 이러한 자기실현의 명령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자기 성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모든 이의 이러한 욕구에 기대어 출간되는 <웰빙bien-etre> 입문서들의 수를 세어보기만 하면 된다.”(p16) 잠깐. 이상하다.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간극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자기 성장”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고?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는 피와 살을 되찾은 헤겔이 트위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까,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이런 멘션을 연속해 타이핑하고 있는 헤겔 말이다.

“…역사적 개인들의 운명에 더 멀리 시선을 던지면, 우리는 그들이 보편적 정신의 점진적 발전 과정의 한 단계를 구성하는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주체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실체와는 구별되는 개별적 주체로서 그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부르는 것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며 투쟁이며 노동이었다. 일단 그 목표를 달성한다 해도 그들은 평온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행위를 통해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열정이 그들의 모든 본성과 기질을 결정하였다.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빈 통처럼 쓰러져 버렸다.” (RH[역사철학강의] 122,123 p60)

헤겔의 성장은 이상하다. 우리는 역사를 실현시키기 위해 ‘성장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은 필요해서 하는 거지, ‘역사적 개인의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하지 않는다. 시대를 잘못 읽고 있다. 벌써 비호감의 대상인데, 헤겔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다. 헤겔에게 인간은 개인이 아니다. 세계가 자신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도 모자라 헤겔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중에게 빈정거리듯 결정타를 날린다.

“역사적 인물들이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추잡한 위안을 얻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추잡한 위안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위대하고 탁월한 것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그 의미를 축소시키고 거기서 결점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질투심뿐이다. 질투심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기 위해 위대한 사람들은 불행하기 때문에만 위대하다고 강변한다.” (RH 124, p61)

육신을 회복하고 삶을 향유하기 위해 트위터를 하는 헤겔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난해한 형이상학을 도입하여 인간을 도구 취급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무리로 모는 고나리질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피와 살을 되찾은 헤겔에게 우리가 할 일은 절대정신에 대한 배움이 아니라 조리돌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평해야 마땅하다. 이 책은 우리가 헤겔을 미워하게 만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우리가 헤겔을, 자유를 본질로 삼아 자기실현의 오뒷세이아를 이론화한 근대성의 화신인 헤겔을 ‘혐오’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비천한 의식의 오뒷세이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청년기 저작인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을 대비해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설명한다. 헤겔에 따르면 고귀한 의식은 외부의 사회적 힘(사회적 규약과 가치체계)과 조화를 이루며 '자신과 사회적 가치를 동일시하는 자아'다. 반면 비천한 의식은 고귀한 의식이 이룬 '조화가 깨지면서 나타나는 상처받은 자아'다. 이 자아는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추구하면서 사회적인 힘과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성취하려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고귀한 의식은 사회가 강제하는 규약과 가치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는 중세적 주체다. 이를테면, 신분제의 끝에 위치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서 신과 합일하려는 열망을 실천하는 농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주체는 내면이 없고, 갈등이 없고,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음습함이 없다. 오직 가치체계에 헌신하는 고결함으로 충만한 주체다. 그래서 고귀한 의식이다.

반면, 고귀한 의식이 달성한 조화롭고 영광스러운 관계가 깨지면서 사회적 가치체계를 불신하게 된 주체, 그리하여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와 대립하게 된 주체가 '비천한 의식' 이다. 즉 사회적 가치체계와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와 대립하고 투쟁하는 '근대적 주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주체는 사회적 가치체계보다 개인의 욕망에 주목하며, 개인의 욕망이 도덕과 가치실현의 원천이라고 본다. 그 때문에 외부에 존재하는 권위가 자신의 욕망과 배치될 때, 이에 반항하고 투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주체는 자기 자신과 합일할 수 없고, 끊임없이 계산하며, 경우에 따라 배신과 투쟁도 가차 없이 실행하기 때문에 비열함과 음흉함이 기본 특징이 된다. 그래서 '비천한 의식'이다.(1)

헤겔은 비천한 의식을 고귀한 의식에서 진화한 역사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즉 자신의 욕망을 의식하고 기존의 규범체계와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근대적 주체야말로 '자유'를 실현할 역사의 근본단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중세의 신실한 주체가 진화한 '대자적 고귀한 의식'이다. 대자적 고귀한 의식에게는 고귀한 의식에게 없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하나는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성’과 마주하여 변증법적으로 합일하는 운동을 지속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내면’의 창출이다. 이는 진정성을 지닌 근대적 ‘인간’을 출현시킨다.

근대의 비천한 의식은 중세적 고귀한 의식과는 달리 자기 욕망을 도덕과 에토스의 중심원리로 삼는다. 그 때문에 객관적 외부를 복종해야 할 규범이 아닌, 부정성으로 인지하고 쟁투한다. 그 과정에 질적 변화는 필연이다. 부정성과 마주하여 자기를 확장하고 부정성과 자기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자아의 무한한 자기복제나 타자로의 무조건적인 복속으로 끝날 뿐이다. 다시 말해, 자기 인식과 부정성의 경험, 쟁투의 과정과 질적 변화를 거치지 않는 여정은 성장이 될 수 없다. 성장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 어딜 가나 똑같은 ‘나’만 존재하거나, 반대로 ‘나’가 없는 세계에서는 ‘자기’가 ‘실현’(발현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발현된 상태로 이행하는 것)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변증법적 운동을 반복할 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즉 자기 욕망을 도덕과 에토스의 중심원리로 삼는 주체는 항상 자기 내면의 ‘진정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주체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 진정성에 응답하여 행위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 때문에 비천한 의식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여 분열하고 갈등한다. 깊은 고뇌 끝에 결단에 이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실천한다. 죽음의 순간이 닥쳐올 때까지 자기 내면에 충실하면서 부정성을 품고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체의 여정은 영웅적이다. 자기를 진지하게 응시하면서 타자에 굴복하지도, 타자를 말살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동일성과 타자성을 포괄하는 업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 결과, 주체는 여정의 끝에서 내재성의 초월에 이른다. 정치의 언어로 번역하면, 개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공동체의 규범에 완벽히 합일하는 내재적 정치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세계정신은 자기를 실현한다. 자아와 타자는 사라짐 없이 구체적이자 보편적 인류로 이행한다. 세계는 전진한다. 두려움 없이 부정성과 마주하여 포기하지 않은 채 초월로 나아간다. 자기실현의 거대한 오뒷세이아의 근본에는 자기 내면을 응시하며 실천하려는 주체가 있다. 이렇게 근대의 비천한 의식은 세계정신의 맹아이자 현실태인 ‘인간’으로 출현한다. 이것이 헤겔이 이론화한 근대성의 핵심이었다. 근대인은 중세의 농부가 공장 노동자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근대인은 세계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이상을 이루기 위한 잠재태이자 현실태였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천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고귀한 초월에 이른다. 헤겔에게 ‘인간’은 이념의 현현이었다.(2)

역사의 종말과 포스트 휴먼의 등장 : 동물과 속물

헤겔 이후 역사는 끝났을까? 마르크스는 끝이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자기의 역사적 과업을 깨닫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자기실현을 성취할 것으로 보았다. 레닌은 그 전망을 현실화 했다. 그럼에도 소비에트 연방에서 종언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종언은 반대쪽에서 나왔다. 미국과 일본을 경유한 프랑스의 헤겔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1948년 미국을 여행하며 역사의 끝과 인간의 지위를 상실한 주체를 목도한다. 코제브가 역사의 끝을 확신한 것은 부정성의 소멸 때문이었다. 자기를 실현한 정신이 만나게 되는 풍경은 안전함이 끝없이 펼쳐진 세계, 인공적 안온함이 부정성을 거세해버린 세계였다. 부정성을 통해 변증법적 운동을 지속하는 ‘인간’은 자연과의 투쟁을 전제로 한다. 자연은 예측불가능하다. 자연의 부정성은 생명을 위협하는 타자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1948년 대량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타자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정성을 마주하여 자기를 실현하려는 변증법적 운동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배고픈 욕구를 빠르게 채워줄 패스트푸드, 진정성에 근거한 고민과 번뇌를 대체할 볼거리와 즐길거리, 통증을 잠재워 줄 진통제와 죽음을 통제하는 병원, 그리고 아프지 않은 몸과 근사한 몸매를 위해 늘어선 헬스클럽이었다. 거기엔 역사가 없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과 함께 인간 역시 멸종해 있었다. 그곳엔 ‘동물’만이 존재했다.

대량 소비 사회에서 주체는 욕구에 지배된다. 무엇을 먹어 맛있다는 감각을 만끽할지, 어떤 병원에 가서 덜 아픈 시술을 받을지, 어느 트레이너를 선택해 근육을 단련해야 더 섹시한 몸매를 만들지 같은 것이 그의 관심거리다. 물론 삶에 부정적 계기와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실현의 계기인 부정성이 아니다. 더 맛있는 음식과 더 쾌적한 여행과 더 안락한 생활을 위한 장애물, 가급적 만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고, 운 나쁘게 만나도 빨리 치워버려야 할 방해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라지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정성을 탈수시켜버리는 ‘동물’만 존재하는 것이다.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역사가 끝난 이후 인간은 새가 둥지를 틀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이 건축물과 작품들을 만들 것이고, 개구리와 메뚜기가 그러하듯이 음악을 연주할 것이며, 어린 짐승처럼 놀고 다 자란 동물처럼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요와 충분한 안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될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이후의 동물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애적, 유희적 행동들을 통해서 만족을 느낄 것이다.” (Kojeve, 1947/1968 : 436 , 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58에서 재인용)

그러나 인간의 끝은 동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56년, 일본을 방문한 코제브는 동물과는 다른 포스트 휴먼을 발견한다. 욕구와 쾌락을 멀리하고 강한 자기 통제를 보이지만, 내면과 진정성을 상실한 주체, 타자의 형식에 맞춰 자신을 전시하는 존재. 코제브는 이를 ‘속물’이라고 불렀다.

“탈역사의 일본 문명은 ‘미국적 생활방식’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아마 일본에는 ‘유럽적’ 혹은 ‘역사적’ 의미의 종교, 도덕, 정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순수한 상태의 속물주의가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규율들은 전쟁과 혁명의 투쟁이나 강제노동에서 태어난, 즉 일본과 다른 나라에서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태어난 규율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었다. 노카구(能樂)나 다도(茶道)나 꽂꽂이 등이 보여주는 일본 특유의 (이에 필적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속물주의의 정점은 상층 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집요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예외 없이 철저하게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완벽하게 박탈당한 그러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간다.” (Kojeve, 1947/1968 : 437 , 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59에서 재인용)

역사란 주체의 자기실현이다. 역사에는 부정성과 마주하여 질적 변화를 담보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요청된다. 규율과 형식은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인간은 규율과 형식을 통해 동물성을 지양하고 부정성과 대결하며 역사를 형성한다. 그러나 속물에게는 이 과정이 뒤집혀져 있다. 즉 역사를 형성하는 부정성이 없음에도 형식적 부정성을 만들고 가상의 대립을 향유한다. 다시 말해,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고 대립하여 주체를 형식에 맞춰 재단한다. 거기엔 내면이 없고, 진정성이 없고, 고양되는 실체가 없다. 핵심은 주체를 형식에 맞추어 텅 비워놓는 것이다. 코제브는 할복을 예로 든다. 즉 할복을 해야 할 이유나 진정성이 없음에도 할복이라는 형식을 채택하여 자살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할복한 주체가 아니다. 할복이라는 ‘형식화된 가치’다. 속물은 고양되지 않는다. 속물은 타자의 형식을 물신화하고 재생산한다. 거기에는 역사가 없다. 반복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본인도 원칙적으로는 이 순수한 속물주의에 의해서 무상의 자살을 행할 수 있다(고전 시대 사무라이의 칼은 어뢰나 비행기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맞이하는 생명의 위기와는 무관한 것이다.”(Kojeve, 1947/1968 : 437 , 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60에서 재인용)(3)

역사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 수 없다. 부정성이 제거된 완벽한 환경 속에서 달콤한 먹거리와 더 튼튼해진 근육을 갈망하는 동물이 되거나, 타자의 형식과 욕구에 완벽하게 부합되도록 자아성형과 통제를 감행하며 미소짓는 속물로 살 수 밖에 없다. 동물과 속물로 전화한 우리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을 닮았다. 부정성과 진정성을 앞에 두고 우리는 “사랑이 무어냐? 창조가 무어냐? 동경이 무어냐? 별이 무어냐? (...) 이렇게 묻고 눈을 깜박거린다.” 최후의 인간은 독일어 Der letzte Mensch의 번역어다. 흥미롭게도 코제브에 의해 속물로 명명된 일본인들은 ‘末人(말종인간)’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헤겔의 눈물

동물과 속물은 감각과 인정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더불어 생존으로 모든 것을 축소시키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아프게 환기시킨다. 그것은 헤겔을 대할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정성의 인간으로 육화한 헤겔을 대할 때, 동물과 속물로 변한 우리는 불편하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는 혐오한다. 분노는 부정성을 맞이하여 부정의가 전제될 때 품는 감정이다. 그러나 혐오는 다르다.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지만 개인의 기호, 즉 취향이 반영된 감정이다. 분노가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혐오는 개인의 호오를 반영한 사적인 감정이다. 거기에는 자아와 부정성을 고양시키는 보편성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가 상실한 것은 공적지평이다. 주체의 진정성은 자신의 취향과 인정욕구를 폐쇄적으로 추구하는 ‘덕후의 자기 윤리’(4)로 전락했다. 타자는 부정성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불편할 뿐이다. 부정성의 타자는 나의 취향과 미감을 거스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럴 때 부정성은 가차없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저런 것이 내 앞을 얼쩡거리는 것은 운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치워버려야 한다. 그렇게 조림돌림을 시행하고 혐오발언을 쏟아부어 대상을 제거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만족스런 감각과 인정욕구뿐이다. 공적 지평은 사라지고 사적 차원으로 회귀한다.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속물과 동물은 주어졌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적지평을 망실시키고 생존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사회적 압력은 나날이 높아져 간다. 압력을 견디다 못해 우리는 혐오와 조리돌림을 시행한다. 그 끝에 남겨진 것은 허탈감과 무력감이다. 그런 우리를 보며 헤겔은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진정성을 회복하여 다시 인간으로 고양될 수 있을까? 헤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전진하지 후퇴하지 않는다. 거기엔 비약이 없다. 현재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처음으로 되돌리는 기만도 없다. 더불어 각 시대에 처한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자신이 속한 시대를 초월한다고, 로도스 섬을 넘어가리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p100)일 뿐이다. 다만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획득하는 능력을 지니게”(p52)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덕후의 자기 윤리로 변한 반쪽짜리 진정성, 물신화 된 감각과 인정욕구, 그리고 생존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동물 또는 속물들과 함께. 헤겔을 담담하게 소개하는 <<헤겔의 눈물>>이 읽을 만한 책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헤겔과 함께 우리는 비천한 것을 무기로 삼아 혐오와 사적 지평을 지양할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역사는 다시 한 번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 끝난 세계와 사투를 벌이는 동물과 속물들의 반복되지 않을 역사를.



(1)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25~28. 김홍중은 트릴링의 논의를 정리하며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헤겔에게 인간정신의 자기실현은 국가가 부와 같은 외적 권능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진행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그런 관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개체의 의식은 외부의 사회적 힘과 조화를 유지하며 자신과 이를 동일시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존경과 감사의 의식인 ‘고귀한 의식’이다. (...) 비천한 의식은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힘의 실체, 즉 개체의 자기 정신이 완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강제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서 이성의 간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자의 의식이다.”

(2) 주체의 변증법적 운동과 세계정신의 자아실현은 프레더릭 바이저, <<헤겔>>, (프레더릭 바이저, <<헤겔>>, 이신철 역, 도서출판 b, 2012)의 <변증법>, <유아론과 상호주관성>, <헤겔의 국가론>(p207~251, p291~329) 부분과 올리바아 비앙키, <<헤겔의 눈물>>(올리비아 비앙키, 에두아르 바리보, <<헤겔의 눈물>>, 김동훈 역, 열린책들, 2014)에서 정신의 자기실현을 다룬 부분(p21~42, p157~175)을 참조하였다. 프레더릭 바이저는 변증법적 운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무엇이 절대적 자립성의 조건들을 완전히 충족시키는가? 그는 오직 평등하고 독립적인 인격들 사이의 상호적인 인정뿐이라고 대답한다. 상호적인 인정은 두 인격이 서로에 대해 평등하고 서로로부터 독립적인 까닭에 비동일성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바로 그 본성에 의해서 그러한 인정은 자기와 타자가 자기들의 평등하고 독립적인 지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상호적인 인정은 또한 자기가 오직 자기의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의식적이기 때문에 동일성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타자가 자기 자신을 자기 속에서 보듯 자기는 자기 자신을 타자속에서 본다. 이러한 상호적인 인정은 다름 아닌 정신으로서의 자기의식인데, 왜냐하면 정신은 평등하고 자립적인 인격들 사이에서의 상호적인 인정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자아들 사이에서 자기의식의 단일한 행위인데, 거기서 각각은 타자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하며 타자는 자기의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p241~242, 강조 인용자) 한편 세계정신의 자기실현에 대해 올리비아 비앙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정신이 보편적인 역사속에서 자신을 파악하고 이러한 자기 의식을 소유한 가운데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것은 바로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구체적 형태를 통해서다. 정신의 이러한 자기의식은 세계 안에서 한 민족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로부터 만들어 내는 의식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 한 민족의 정신이 사라지면 그 특정한 형태는 해체되지만 그보다 더 보편적인 정신의 한 형태인 세계정신이 등장하게 된다. <어떤 특정한 민족의 특정한 정신은 쇠약해져 사라질 수 있지만 그것은 세계정신의 발전 과정 중 한 단계를 구성하는데, 이러한 세계정신은 사라질 수가 없다.> 세계정신 즉 보편적인 정신은 -한 민족의 한정적인 형태 안에서는- 가장 높은 절대자로서의 의미를 자니는, 자기의식을 지닌 정신이다. <새롭게 규정된 민족정신은 그때마다 세계정신이 자기의식과 자유를 쟁취해 나가는 투쟁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준다.>” (p40~42, 강조 인용자)

(3) 여기까지 나온 코제브의 논의와 번역문은 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p57~60을 따랐다.

(4) ‘오덕후/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음역한 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 이은미 역, 문학동네, 2007)에서 일본의 오타쿠를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모에를 감각적으로 소비하고 추구하는 ‘동물’이자 ‘속물’로 파악하고 있다.(p116~130, p148~165) 다시 말해, 오타쿠의 존재 윤리란 만족감을 선사하는 대상을 무한정 향유하면서, 오타쿠계 문화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이 비틀린 윤리는 칸트의 자유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이 요약하여 나타내는 바,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에 헌신하는 행위만이 자유인 것이다. 그 결과 오타쿠는 (자기만족감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공적지평이 제거되어 있다. 자유는 공적인 대결의 장으로 나서지 못하고, 개인의 취미와 오감을 만족시키는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취향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오타쿠의 자기 윤리이며 진정성이다. 한국의 경우 덕후 내지 덕질이란 용어는 오타쿠의 자기 윤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해하고 불편함을 일으키지 않는 대상을 수집하여 SNS에 전시하는 것은 보편적 삶의 한 방식으로 통용된다. 더불어 ‘덕후’는 ‘오타쿠’가 본래 지니고 있는 부정적 어감조차 없다.

 

아포피아 4월호에 게재되었다. 링크를 걸어둔다. ( http://www.aporia.co.kr/bbs/board.php?bo_table=rpb_community&wr_id=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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