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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로서 삶을 시작할 이유.

빵가게제빵사 2016. 12. 13. 15:50

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불편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인간 본성을 거스른다. 인간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믿는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가족, 내 앞에 놓인 음식, 안부 문자를 보낸 친구의 신뢰, 내일도 해가 뜰거라는 확신, 어제와 같은 일상이 오늘도 반복되리라는 예상. 이것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사실을 믿음으로 바꾸고 의심을 주입하는 것이다. 온건한(?) 회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신뢰, 삶을 이끌어 온 원칙, 사회적 규칙과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규칙과 원리는 행위와 선택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의심은 의심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과 선택의 기준을 망실한 적막에 놓이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가 끝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존 그레이는 이 불편함을 선사한다. 인류사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휴머니즘을 공박하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유토피아즘이 저지른 파괴와 학살, 어리석음을 낱낱이 드러내는 <<추악한 동맹>>, 불멸을 추구한 과학적 시도를 망상으로 묘사하는 <<불멸화 위원회>>, 유토피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가짜 여명>>에 이르기까지. 그레이의 책을 연달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흔들고 안정감을 빼앗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에  의심과 불안에 휩싸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레이가 옳았음을 깨닫는다. 방금 덮은 책에서 그레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믿음을 박탈당하면 도대체 견뎌내질 못한다.” 인간이란 자의식을 지닌 불쾌한 짐승에 불과하다는 독설은 증명된다.

그레이의 주된 공박 대상은 유토피아즘이다. 유토피아즘은 인간이 갈등과 위협과 불쾌함이 없는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레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극히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유토피아즘은 불안정한 현실을 파괴하여 더 많은 살육과 폐허를 만든다. 굴락, 중국 공산당, 킬링필드, 이라크 전쟁이 언급된다. 그레이의 공박은 강력하다. 읽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하지만 의문이 멈추지 않는다. 그레이의 말에 따라 유토피아즘을 경계하고, 추상적 원리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회의주의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위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혹시 삶을 파괴하는 허무주의는 아닐까? 그레이가 직접 답할 의무는 없다. 회의와 의심은 다른 삶을 설계한 후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동물들의 침묵>> 2장은 이 질문에 답한다.

<<동물들의 침묵>> 2장은 회의주의자 프로이트를 불러온다. 그레이가 불러온 프로이트는 일견 혼란스러워 보인다.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발견하였지만, “갈등을 평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고, 인간이 “병든 상태임을 발견”하였지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또한 “우리 삶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운명”이라고 회의했으면서도 “수동성”으로 회피하지 않았고, 인간사에 체념하면서도 “자아를 강하게 키워 운명에 대항"하려 했다. 그레이가 제시한 프로이트의 초상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역설이란, 어느 쪽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진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는 프로이트의 초상을 길게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프로이트의 삶은 인간의 의지가 운명에 대항해 자신을 밀어붙인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다. 하지만 그는 운명이 극복될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토록 고집세고 의지적인 인간이 체념을 설파한 이유이다.” (p106)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이 이드-에고-슈퍼에고로 이루어진 갈등의 장임을 발견했다.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이드의 에너지는 에고에게 욕망으로 투영되고, 슈퍼에고에 의해 억압된다. 억압된 욕망은 회귀하고 다시 억압된다. 이 과정은 항구적이다. 평정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드의 욕망과 슈퍼에고의 억압은 에너지로 분출되며 순간의 승화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 투항해 수동성으로 회귀하지도, 갈등을 완벽히 제거하려는 능동성으로 이행하지도 않는다. 갈등이 실존의 조건임을 인지하고 때로는 거기에 굴복하고 때로는 밀어붙이면서 그 ‘사이’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진리는 필요없다. 한쪽이 선이고 반대쪽은 악이라는 가치를 덧씌울 필요도 없다. 그 사이를 헤쳐나갈 때 필요한 나침반은 ‘더 나은 삶’을 욕구하는 것뿐이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수 있다. 그것이 “에고를 짓는 과정”이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 삶을 전보다 더 상상력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나를 보게 되면 나 자신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삶은 새로운 허구에 의해 구성될 것이다.(…) 허구의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많은 삶들을 발견한다.” (p128~129)

진리와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상의 본(本), 허구를 따르게 된다. 허구는 어떤 일이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나타내는 믿음이다. 진리를 믿는 자와 회의주의자는 이 지점에서 갈린다. 진리를 믿는 자는 진리가 아닌 것을 배척하며 진리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자신이 한 선택이 진리가 아님을 안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복무할 뿐이다. 그러므로 잘 마무리되어도 또 다른 선택이 필요함을 알며, 끝이 아님을 안다. 잘 되지 않아도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며 기꺼이 체념할 수 있다. 진리를 믿는 이는 열정을 통해 사람들을 추동할 수 있다. 그들이 약속하는 것은 유토피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파괴와 학살로 이행한다. 반면 회의주의자는 타인을 추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허구와 허구를 건너뛰며 ‘자유’와 ‘새로운 세상’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허구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일종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이것이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일 것이다. 세계에 의미가 부여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만들어 낸 의미에 스스로 갇힐 일도 없다. 우리 세계에 있는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에서 가치라는 것이 아예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아무것도 없음’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귀한 재산일지 모른다. 우리 자신을 넘어서 존재하는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 (p124)

극단적인 회의주의는 인간을 ‘동물’로 추락시킨다. 그레이의 책은 그런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그레이가 공격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그것이다. 왜 인간은 자신과 ‘동물’과 다르며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의 가치가 다른 생명체의 본능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 모두는 착각이다. 오히려 인간이란 동물의 존엄을 더럽히는 상스러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을 때 원숭이들은 우스웠을 것이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은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공중에서 우아하게 그네를 탔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땅에 매여 있었고, 상스러웠다. (….) (원숭이) 자신들은 섬세하게 손질한 풀이나 과일을 먹는데, 네안데르탈인은 우악스럽게 날고기를 먹고 다른 동물은 물론 자기 동족까지 살육하지 않는가? (…) 네안데르탈인은 상스럽고 잔인했으며 동물의 존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도로 문명화된 원숭이들의 눈으로 보면 네안데르탈인의 탄생은 역사가 야만으로 뒷걸음 친 것이었다.” (p10~11)

그레이의 논의는 매우 과격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진리를 거부하는 그의 논리는 불편하다. 하지만 과도한 인간혐오를 걷어내면, 그가 제시하는 회의주의자의 삶은 우리의 것과 닮았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논의는 그런 면에서 ‘진리’일 수 있다. 더불어 진리를 설정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을 박멸하려 드는 유토피아주의자에게 그레이의 논의는 매우 유용하다. 그레이의 책은 회의주의자가 전념할 수 있는 삶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좋은 삶으로 수렴된다. 우리가 회의주의자로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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