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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전대호 역, 필로소픽, 2018. 6月

반양장, 신국판보다 작은 사이즈, 160쪽, 14500원.


견적서를 내기 전 이 책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불온한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이 책을 왜 읽으려 하는가? 내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대략 다음의 세 가지 경우일 것이다. 

1) 지금 핫한 정체성 정치(노골적으로 말해 페미니즘)가 가져올 위험을 파악하고 이를 '미리' 비판하기 위해서.

2) 1)과 반대로 정체성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이 책을 역비판함으로써 정체성 정치(노골적으로 말해 페미니즘)를 공격하는 논의를 잠재우기 위해.

3) etc. (정체성 정치가 무엇인지 왜 비판한다는 건지 궁금해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가 쓴 저작이라니까 얻을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요즘에 핫하다니까 한 번 읽어보려고 등등, 물론 그 외 정치학 애독자들이 있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위너겠으나, 이는 나중에 언급.)

물론, 대부분의 독자는 1) 아니면 2)일 것이다. (저도 알아요. 여러분의 검은 속셈을.) 하여, 거두절미하고 답해드리자면 이렇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왜 안될까? 그것은 이 책이 광고와는 다르게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마초 정치학자의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현 미국의 정치 지형을 1) 미국의 공동선을 돈벌이로 타락시킨 우파와 2) 강단 급진 좌파로 변해 정체성 정치를 부추겨 분열을 조장, 연대와 시민의식을 파괴시킨 좌파로 구분하고 이 둘을 똑같이 비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의 종말'로 불리는 트럼프 당선에 맞선다는 좌파들이 "더 급진적인 정체성 정치로!"를 외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분량이 많을 뿐이다. 물론, 더 매서운 어조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마크릴라가 미국의 좌파 또는 진보진영을 구제불능의 집단으로 보고 미워하기 때문일까?) 이 책이 정체성 정치(만)을 비판하는 책이라는 소문은 과장된 것이다. 그러니까 광고에 낚인 것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 책이 유통되고 읽힌 경로가 비슷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출판사나 서점이 여러분을 무지막지하게 낚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한편, 광고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럴 때 낚여 책 사지 않으면 언제 사보겠나. 너무 예민해지지 말자.)

이제 책의 모양새가 짐작될 것이다. 이 책은 1) 레이건 시대부터 시작된 우파의 행보가 공동선을 돈벌이로 타락시키고, 시민이던 미국인의 지위를 1인 기업가 또는 탐욕스런 장사꾼으로 전락시킨 과정 2) 60년대 신좌파 운동 후, 급진 좌파가 강단 좌파로 변해 정체성 정치에 집착(?)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시민의 연대를 망실시키고 시민의식을 박탈시키는 과정 3) 해결책으로 미국의 공동선과 가치를 회복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정치의 부활과 재정립, 그리고 이를 존중하며 정치적 의무를 이행하는 시민을 육성하자고 제안하는,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2)에 대한 분량이 많고 3)에서도 강단좌파와 급진적 정체성 정치를 반복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지만, 그런 서술이 나오는 까닭은 마크릴라가 대화 상대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미국의 진보진영이기 때문이다. (저자 마크릴라는 트럼프 당선을 이끈 미국 우파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말하자면, 저자가 희망을 품고 있는 대상은 미국의 진보진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신중함을 신조로 삼는 스트라우스 학파의 일원인만큼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겠다.

요컨데, 책의 핵심은 미국의 공동선과 시민이 우파와 좌파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이론서라기보다 역사적 서술에 가까우며, 과정을 묘사하며 비판적 논평을 덧붙이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런 까닭에 정체성 정치를 비판/역비판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이론적 논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굳이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사용하겠다면 하나의 사례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마크 릴라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이것이 엄격한 역사책도 아닌만큼 그의 진단에 의문이 제기되고, 심각한 반박에 부딪칠 것은 자명하다. 다시 말해, 비판을 위해 이 책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부디 잊어주세요.) 오히려 마크릴라의 주장을 따라가면 본격적인 정치 이론의 문제, 거칠게 말해 '공동체주의' 와 '자유주의'의 첨예한 대립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정체성 정치 이전의 복잡다기한 이론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물론 마크릴라의 주장을 '공동체주의' 또는 (좌파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해) '국가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가 이야기하는 '시민'과 '정치'가 그런식으로 환원될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책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론적 함의를 끄집어내지 않는다. 단지 미국에서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를 언급할 뿐이다. 요컨대, 이 책은 저명한 정치학자가 자국의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쓴 팸플릿이다. 한국에 다이렉트로 적용할만한 이론이나 함의는 없다.

견적을 낸다. 이 책은 우파와 좌파가 어떻게 미국의 공동선과 시민을 파괴했는지 묘사한 스케치다. 공동선의 회복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정치의 복원, 그리고 시민육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팸플릿이다. 하여 이 책에 적합한 독자는 1) 정치학 연구자 2) 정치 (서적) 덕후 3) 미국의 정치 지형과 최근의 논의를 파악하고 싶은 독자. 4) (구제불능의) 마크릴라의 애독자들, 이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역비판 하기 위해 자원을 찾는 (음흉한) 독자는 피하는 게 좋다. 소득이 없지 않겠지만, 분명 빈약한 자원(?)에 실망할 것이다. 아울러 교양을 추구하는 독서가나 일반 독자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책이 어렵지는 않지만,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공동선, 시민, 시민의식, 정치의 회복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왜 이것들이 해결책인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기점으로 마크릴라의 다른 책으로 이행하거나, 스트라우스의 저작으로 옮겨 갈 예정이라면 나쁘지 않다. 이 책의 핵심을 추려 한국의 상황에 맞게 변주할 야심을 지닌 독자에게도 맞춤하다. 그러나 상당히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책은 문고본으로 불러도 좋을만큼 작고, 분량도 적다.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아 천천히 읽는다고 가정해도 3~5시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한편 현 미국인을 독자로 삼아 쓴 책인만큼 미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한 독자가 아니라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군데군데 나올 것이다. 건너뛰어도 요지를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없지만, 책을 완벽히 장악했다는 느낌은 받기 어렵다. 여러 번 읽을만한 책인지도 약간은 의심스럽다. 오히려 차분하게 한 번 정도 읽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한다.

견적은 끝났다. 그러나 한 가지만 부탁하자. 고백하자면 나는 한정된 독자만을 가진 이 책의 애독자다. 정확하게 말해 '4) (구제불능의) 마크릴라의 애독자'에 해당한다. 역사를 상기하자면, 마크릴라의 저작은 한국에서 두 권(<<분별없는 열정>>, <<사산된 신>>)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워낙 호응이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이 책마저 팔리지 않는다면, 그의 전작 <<난파된 마음 : 정치적 반응 (The Shipwrecked Mind: On Political Reaction, 2016)>>은 번역될 가능성이 없다. 고로 마크릴라의 전작을 번역본으로 만나고 싶은 (구제불능의) 애독자는 반드시 책을 두 권 사자. 세 권도 좋다. 한 권은 소중히 간직하고 다른 한 권(두 권)은 주변 지인에게 선물하자. 니 돈 들여 안 사면 내 돈 들여 사주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읽으면 피와 살이 된다는 비과학적, 비논리적, 비정치적 이야기도 서슴지 말자. 저명한 정치학자의 명저라는 사탕발림도 두려워하지 말자. 출판사 홈페이지(페이스북에 있다)에 감사 댓글을 남기고, 번역자 전대호 선생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를 쓰자. 오직 그것만이, 오직 그런 분투만이 <<난파된 마음>>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만나볼 유일한 길이다. 고로 이 견적서의 최종 결론은 이렇다. 한국의 마크릴라의 애독자들이여 (번역본을 위해) 연대를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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