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판카지 미슈라, <<분노의 시대>>, 강주헌 역, 열린책들 2016. 6月

양장, 신국판, 총 464쪽, 22000원


제목을 보고 책을 산 독자라면 낭패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특히 분노와 폭력과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요즘의 풍경에 대해 통찰을 얻고 싶었던 당신이라면 더 그랬으리라. 이 책은 분노에 대한 르뽀가 아니다. 혐오의 심리적 원인을 탐구한 책도 아니고,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시대, 즉 21세기에 시작된 전지구적 테러의 기원을 계몽주의와 그것의 반동으로 파악하고 추적하는 역사책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괜찮다. 나도 이 부분에는 밑천이 별로 없으니까.

눈 밝은 독자들은 “21세기에 시작된 전지구적 테러의 기원을 계몽주의와 그것의 반동으로 파악하고 추적”한다는 말에서 ‘지성사’라는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그런 역사가 있다. 특정 시대와 장소를 대상으로 삼아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추적하는 ‘생각의 역사’ 같은 것 말이다. 엄격한 학문으로 성립되어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성과는 풍성하다. (사상사/지성사/개념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요즘엔 지성사가 많이 쓰이는 편이다.) 대체로 난이도가 있지만, 비전문가도 얼마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지성사 저자들은 자기가 다루는 지역/시간의 역사적 이벤트를 독자들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으면 수월할 것이다. 유럽 지성사를 읽는다면 <<종횡무진 서양사>> 정도는 미리 복용해두는게 좋지 않을까.

하여 이 책이 지성사 책이냐고 묻는다면, 미안하다. 말장난 같겠지만, 그렇기도하고, 아니기도하다. 넓게 보면, 이 책은 계몽주의 사상과 그것의 반동으로 나타난 낭만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그리고 전투적 민족주의 문화를 하나로 엮어 고찰하는 지성사 책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지성사란 사상의 변화를 추적할 뿐이다. 반면 이 책은 헤게모니를 쥔 사상과 그것의 반동을 ‘전유적 모방’과 ‘원한’이라는 개념(이게 뭐냐고? 궁금하면 책을 읽으시라)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역사적 사례로 확인하는 책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전개를 엄격하게 따라간다기보다, 주장을 제시하고 역사적 사건을 사례로 삼아 증명하는 형태다. 그 때문에 디테일이 생략되고, 선별된 사례들이 나열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요컨데, 결론을 정해놓고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지성사적 흐름을 일별했다고 할까. 지성사를 다루지만, 엄격한 지성사 책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수정주의자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올해 나온/나올 어떤 역사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최상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견적이다. 이 책은 18세기에 태동된 계몽주의와 그 반동으로 나타난 여러 사상들의 계보를 추적하고 그것이 어떻게 21세기의 분노와 테러를 낳는 사상으로 귀결되었는지 서술하는 지성사 계열의 책이다. 매우 빼어나고 탁월하다. 다만, 저자의 주장은 유럽지성사, 유럽 근대정치사상사를 읽어 온 독자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럽지성사 독자들은 호기심으로 읽든지, 필요한 부분을 발췌독하든지, 아니면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반면,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계몽주의’, ‘사상적 반동’, ‘낭만주의’, ‘전투적 민족주의 문화’ 같은 단어에 알러지가 생기고 숨이 막히는 독자라면 피해가는게 현명하다. 하지만, 유럽 근대사를 어느정도 알고 있고(고등학교 세계사 정도의 지식이면 충분하다), 루소, 데카르트, 계몽주의, 낭만주의 같은 단어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책이다. 요컨대, 학술서 독자들에게는 쉽고, 일반인에게는 약간 어렵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읽겠다고 결정했다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임을 약속한다.

당신이 일반 독자라면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저자의 글쓰기를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흐릿하게 스케치하고 그 뒤에 디테일을 더하고, 다시 디테일을 더하는 식으로 그림을 완성해가는 스타일이다. 이런 경우, 그림을 전체적으로 파악한 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비슷비슷한 그림 몇 개가 보이겠지만, 다시 읽을 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림이 연결되고 맞춰지면서 저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좌절과 증오와 원한이 탈출구없이 반복되는 근대세계의 황량한 풍경. 그것을 보고 나면 왜 이 책이 탁월한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주제에 익숙한 독자라면 완독까지 3~5일, 일반 독자라면 7~14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천천히 다시 읽기를 해 본다면 2주에서 한 달 가량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한 달에 딱 한 권만 읽겠다는 독자에게 맞춤하고, 한 달에 3~4권 읽는 잡식성 독자에게는 약간 버겁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