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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나에게 어려운 까닭은 결국 내가 그 책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적어도 지금은 내가 그 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에게 어려운 책은 불량한 책이거나 불필요한 책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내가 필요로 하고 잘 쓰인 책이라면 애초에 어려울 수 없다. 그러므로 ‘어려운 책을 잘 이해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모든 책을 잘 이해하는 방법‘만 있는 것이다.”

                                                                                                   -가토 슈이치,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 p196. 사월의 책, 2014-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을 읽었다. 독서술 책으로는 출간이 늦은 편인데 원작이 1962년에 쓰인 것을 보아도 그렇고, 알맹이 없이 불어댄 인문학 열풍(?)이 끝나가는 작년에 나온 걸 보아도 그렇다. 읽어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이 책은 독서술, 서지술 책으로는 내용이 빈약하다. 책을 고르는 방법부터 노트필기하는 요령까지 알려주는 수전 바우어의 <<독서의 즐거움>>이나 독서를 위한 공간과 음식까지 고려하라는 와타나베 쇼이치의 <<지적 생활의 발견>>에 비교하면 잡담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정점은 8장 “어려운 책을 읽는 독파술”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책을 읽는 방법을 다룬다면 해설서를 먼저 읽으라든지, 그 계통 책에서 가장 고전 급의 책부터 읽으라든지, 노트정리를 하면서 내용을 요약하며 읽으라든지 하는 나름의 방법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려운 책을 딱 두 가지로 정리한다. 1) 저자나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해 엉망으로 쓴 책이든지 2) 자기에게 불필요한 책이다. 1)의 경우에 대해 저자가 내놓는 답은 “읽을 필요가 없다”이다. 황당한 것은 2)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답이 한결같다는 점이다. 그는 서양철학을 예로 든다.


“우리가 잘 아는 예를 들자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 철학의 번역서가 있다. 역자가 독일어를 잘 모르거나 철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혹은 아마도 그 양쪽이 다 해당되어서 원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어 단어로 바꿔 놓은 것으로 그친 경우가 적지 않다. (...) 불문학자 히라이 히로유키(1921~92)는 장 폴 사르트르를 이해하는데 후설의 현상학을 읽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본어 번역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설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어보니 그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 히라이 씨가 프랑스어를 읽듯이, 혹은 내가 영어를 읽듯이 서양어를 읽지 못하는 독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서양 철학 책을 읽지 않기로 하면 된다. 햄릿 왈, ”어차피 세상에는 철학으로 알 수 없는 일이 태반이다.“ 독일 관념론 이외에도 한우충동, 책은 얼마든지 있다.”(강조: 인용자, p171~172)


어려운 책이란 필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썼거나, 번역이 엉터리거나, 내게 불필요한 책이다. 그러므로 가차없이 제거한다. 모두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만 독서 계획을 세운다. 저자의 말대로 ‘한우충동, 책은 얼마든지 있다.’ 얼핏보기엔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언제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인문학을 공부하는 독서모임’들이 증명하듯이, 인문학 독서는 존재의 성장을 위한 유일한 길로 각광받고 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어려운 인문학 텍스트(주로 고전)를 낑낑거리며 읽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기묘한 서사가 독서모임을 지탱한다. 본질적으로 전문적인 논의는 어렵기 마련이고, 그것이 난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난해한 인문학 서적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존재가 성장한다는 발상은 넌센스다. 오히려 작금의 ‘인문학 독서’는 독서인을 특권화했던 문화적 전통과 자기계발의 서사가 결합하여 대중들에게 진입로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감을 누리라고 부채질하는 장사에 가깝다. 세상에는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지식이 있고, 그런 것을 배우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전부이며 다른 것에 비해 특권화되어야 할 정당성도 없고, 존재 운운해 가며 신비화시켜야 할 당위도 없다. 저자말대로 ‘한우충동, 세상에 책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에 따라 우리는 다른 독서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아는 것은 읽고, 모르는 것은 읽지 않는다. 필요하면 어려운 책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자기의 필요를 충족하며 한정된 영역의 풍요로움과 흘러넘침을 축복한다. 대안적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말하는대로 자신의 ‘정신건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면 생각해 볼만한 독서생활이다. 이것이 이 철늦은 독서술책을 뒤적거려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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