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Reviews

정신현상학을 구입하다

빵가게제빵사 2015. 9. 3. 21:02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실체는 오로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라거나 자기의 타자화와 자기 자신을 매개하는 것인 한에서만 참으로 주체인, 또는 같은 말이지만, 참으로 현실적인 존재이다. 주체로서의 살아있는 실체는 단순한 부정성이며, 바로 그 점을 통해 단순한 것의 양분화나 대립시키는 이중화이거니와, 그것은 또 다시 이러한 무관심한 상이성과 그 상이성의 대립의 부정이기도 하다. 오로지 이렇듯 스스로를 회복하는 동등성 또는 타자존재 속에서의 자기 내 반성 - 즉 근원적 통일 그 자체나 직접적 통일 그 자체가 아닌 것 - 이야말로 참된 것이다.” 

이 끔찍한 문장은 헤겔의 것이다. 헤겔의 모든 문장이 저런식은 아니지만 <<정신현상학>>은 유난하다. 하여 독자는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 부정성’, ‘단순한 것’, ‘양분화나 대립시키는 이중화’ 같은 개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무관심한 상이성과 그 상이성의 대립의 부정’이라는 것과 동일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한 페이지쯤 읽고나면, 철학사에서 불변의 지위를 얻은 이 고전이 과연 ‘언어로 쓰인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나는 대학생때 <<정신현상학>>을 처음 접했다. 임석진 선생이 번역한 2판(지식산업사)이었고, 가급적 원저의 표기방식을 살린 그 번역본은 위의 번역과 비슷했다.(위의 번역은 이신철 선생이 번역한 <<정신현상학 입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 장이나 간신히 읽었을까, 바로 덮어버리고는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일정정도의 책을 읽지 않으면 책망당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헤겔을 한 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가 상식처럼 여겨지던 때라 더 뒤져볼만도 했으나 미련없이 덮어버렸다. 기억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물건’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정신현상학>>도 1년쯤 지나서 어느 후배에게 떠넘겨버리듯 주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정신현상학을 기웃거렸던 적이 없다.


<<정신현상학>>에 도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테리 핀카드의 전기,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을 (뒤늦게) 읽게 되면서였다. 그의 전기를 읽으면 <<정신현상학>>을 쓸 때의 헤겔에 대해 두 가지를 알게 되는데, 우선 <<정신현상학>>을 집필할 때 헤겔은 확신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어떻게든 자신의 체계를 밀고 나가 완성시켜야 했다는 점이다. 헤겔의 철학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주체가 내재성을 통해 초월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체계나 도식을 거부하고 내재적 운동으로 범주와 체계를 산출하여 절대정신에 이르는 헤겔의 비전은 전인미답의 것이었고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원형적 철학체계 때문에 외부의 설명을 끌어들일수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내재적 정의와 자기부정을 반복하는 단어의 연속으로 의미를 서술해야 했고, 그런 서술을 통해서 자신의 체계가 타자와 소통되리라는 강력한 신념을 견지해야 했다. 이 비상식적인(?) 신념은 ‘정상적인’ 상황, 즉 자신과 세계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는 나올 수 없다. 불가능함을 매순간 직시하면서도, 상황을 타개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역량으로 목적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의지적 결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의 극도의 난해성, 독자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완고함, 급격하고 강렬하며 읽을 수 없는 문체의 특징은 여기서 비롯된다. <<오뒷세이아>>는 인간이 시련을 통과했을 때, 그 자신만의 것으로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오뒷세이아였다. 그리고 귀환에 성공한 오뒷세우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현상학>>은 그의 운명이 되었다. (헤겔이 일생을 거쳐 완성한 체계는 <<정신현상학>>의 비전을 그대로 담고 있다.) 물론, ‘철학역사상 최악의 논술’이라는 악평을 받아야 하는 운명이었기는 하지만.

어떤 이유로 <<정신현상학>>을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임석진 선생이 수정을 거듭하여 다시 내놓은 수정 3판 (한길사)이다. 의역이라고 할 정도로 난해한 문장들이 수정되었고, 이해를 떠나 일단 읽을 수 있게 된 번역본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일반인을 위한 쉬운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테리 핀카드의 전기는 절판되었다가 최근에 <<헤겔>>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