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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s

한나 아렌트

빵가게제빵사 2015. 12. 29. 20:52



Hannah Arendt
(1906.10.14 ~ 1975.12.4)


철학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라지만 그런 일반론이 성립되지 않는 철학자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나 아렌트가 그렇다. 스승이었으며 한때는 연인이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렌트에게는 죽음의 음습한 그림자가 전혀 어른거리지 않는다. 그녀는 시작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논했고, 죽음을 넘어 어떻게 새롭게 '탄생'할 것인지를 궁구했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제거된 것도 치워진 것도 아니었으며 극복의 대상도 순응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되어야 할 것이었으며, 주의깊게 마주하며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죽음과 여러번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그녀는 새로이 시작하는 인간의 가능성과 탄생의 기적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죽음과 조우한 그 여러번의 경험 중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프랑스의 귀르수용소에서 뉴욕까지 이르는 유럽에서의 마지막 탈출일 것이다. 아렌트는 무국적자로 분류되어 귀르수용소에 억류되었다. 독일을 벗어난 이후 떨어져본 적이 없던 어머니는 물론 인생의 동반자로 사랑을 나누었던 하인리히 블로허와도 강제로 단절된 상태였다. 여자들은 한 곳에 집합되었고 명령받았으며, 쥐와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감방에 처넣어졌다. 수용소 생활은 단조롭고 별 일 없는듯이  흘러갔지만, 이송과 처형의 우울한 암시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렌트는 밤에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곳에서 '미래가 금지된 역사의 천사'를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죽음은 그녀의 내일을 빼앗지 못했다. 독일의 파리진격이 시작되자 귀르 수용소는 일시적인 혼란에 빠진다. 그 기미를 알아챈 아렌트는 아무것도 주저하지 않고 수용소 정문을 통과해 그냥 '걸어'나온다. 밤에 걸칠 숄은 커녕 물 한 통 없는 상태였다. 단 한 권의 책을 옆에 낀 채, 그녀는 그저 희미한 감각에만 의지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무려 200km가 넘는 거리였다. 물론 그녀가 도착할 몽토방에서 도움을 얻거나 아는 이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그녀 삶에 드리워진 시작의 '기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기적은 진실로 일어났다.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하인리히 블로허를 그곳에서 만났고 그의 뜨거운 어깨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 둘의 포옹은 연인의 것도, 유태인이라는 동류의식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직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절망에 자신을 내맡겨본 적이 있는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생의 경외와 연대감이었을 것이다. 




 하인리히 블로허와 아렌트는 나치의 추격을 피해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척 초췌해진 발터 벤야민과 만난다. 벤야민은 아렌트 일행에게 자신의 마지막 원고를 맡긴다. 벤야민은 만류를 뿌리치고 아렌트 일행과 떨어져 단독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국경에서 벤야민은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독일이나 프랑스로 되돌려 보내지게 되었고, 이에 절망한 벤야민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가지고 다니던  모르핀 정제를 먹고 자살한다. 벤야민이 자살한 그 다음날부터 입국심사가 '기적적'으로 느슨해졌고, 그건 단 며칠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바로 그 '며칠 사이'에 아렌트 일행은 벤야민과 같은 경로로 마르세유에서 스페인으로 입국할 수 있었고, 무사히 리사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터 벤야민이 실패한 그 길을 한나 아렌트는 극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41년, 한나 아렌트는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5월의 뉴욕에서는 비가 자주 내린다. 리사본에서 뉴욕까지는 몇달이 소요되는 지루하고도 긴 여행이다. 그 때문에 항구에 입항하기 위해 경적이 울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씨에 관계없이 갑판에 나오게 된다. 한나 아렌트와 하인리히 블로허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하늘에서는 약한 빗줄기가 흩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렌트는 낡고 볼품없는 코트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얼굴은 야위고 지친 기색이 영력했다. 머리는 금새 젖었고 코트는 오랜만에 만나는 빗물을 흠뻑 빨아들였다. 하지만 아렌트는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신대륙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은 낮게 가라앉고 뉴욕은 어두운 잔영속에 마천루를 드러내고 있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속에서 아렌트는 경적소리를 들었으리라. 그들 위로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렌트 역시 할 말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독일에서 프랑스, 프랑스에서 스페인, 두 번의 구금과 심문, 무국적자와 집단수용소까지 겪고 나서 얻게 된 '자유'였다.  



 

  아렌트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삶을 재생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개념으로 정초되었던 그녀의 사상은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폭력 앞에서 현실로 이행했고 전체주의의 심장부를 고통스럽게 탐색했다. 인간의 복수성과 정치적 가능성을 전적으로 열어놓는 세계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그녀는 인간을 기계적 반복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녀에게 세계는 죽음앞에서 완전해지는 관조가 아니라, 끊없이 이어지는 생의 기적과 두려움 없이 '행위'하고 구성하는 가능성의 순간들이었다. 이것이 그 모든 폭력과 근본악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발견한 인간의 탄생성, '세계사랑'이었다.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인간세계는 언제나 인간의 세계에 대한 사랑의 산물이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그것의 잠재적 불멸성, 즉 세계에 대한 사랑의 잠재적 불멸성은 세계를 건설하는 인간의 가멸성과 그 안에서 사는 인간들의 탄생성에 항상 종속된다. - <정치의 약속>,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p248~249 
 

  한나 아렌트는 심장마비로 1975년 12월 4일 맨하튼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를 추억하며. 



*** 예전에 썼던 글을 옮겨온다. 사망일에 만나는 철학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자들의 약전을 써 보겠다고 끄적였던 것인데, 이래저래 끝은 못 맺고 몇 편의 단편만 남았다. 언제 시간이 되면 50명을 채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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