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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의 정치

빵가게제빵사 2016. 10. 8. 23:41

어떤 이유로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을 뼈대삼아 희랍부터 홉스까지의 ‘정치’ 를 간략하게 정리해 둔다.

희랍의 정치.(1)

정치는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 하여 참조할만한 저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의 공동체 즉 Polis를 코이노니아 폴리티케(koinonia politike)라고 부른다. 코이노니아는 ‘결사체/공동체'로 번역되는 말이며, 폴리티케는 '폴리스의/폴리스적'으로 번역된다. 합치면 '폴리스적 공동체'가 된다. 이때 정치는 폴리스적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고, 행위하고,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정치란 제도나 공적영역의 업무가 아니다. 인민의 어떤 상태다.)

그런데 폴리스적 결사체에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예을 떠올려보자. 우선 시계를 꺼꾸로 돌린다. 대략 B.C 1000년 쯤으로 돌아가자.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 '가’ 라는 마을을 건설한다. 가 마을엔 한 100명 정도가 살며,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자급자족하는 원시공산공동체 모습이다. 이제 이 마을에 주어진 환경을 보자. 이 마을엔 추장이 없다. 대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마을 이장을 맡는다. 한 달에 한 번씩 마을 회의를 소집하여 마을의 운영에 대해 논의한다.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 남자들이 모여 마을의 중요사안을 토론하고 결정한다. 의제는 다양하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작황이 별로일 것 같은데 쌀은 어떻게 배분할 건지. 산 너머에 있는 나 마을에서 작황이 좋지 않다고 침입해 올 기세인데, 무기를 마련하여 선제공격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쌀을 나눠주고 대신 포도를 받아올건지.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으며,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결정하면 복종한다. 이런 마을의 삶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이 애매하다. 일도 공동으로 하고, 그때그때 생기는 문제도 공동으로 논의하고 결정한다. 마을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적인 일은 바로 구성원인 내 일이며, 내 결정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다시말해 마을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며, 그 운명은 나와 동등한 다른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여 결정한다. 사적인 것이라고 해 봐야, 식사, 잠, 결혼 출산 장례 정도다.

가 마을을 아티케의 구석으로 옮겨놓으면 대략 아테나이의 정체가 된다. 즉 polis가 된다. 폴리스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은 공적인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가장 우선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고 내가 기꺼이 참여하여 논의하고 결론을 내리는 '자신과 폴리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의제에 대응하기 위한 토론, 논의, 갈등, 중재, 결정의 과정들이 있고, 이런 것을 행위하며 사는 것. 이것이 '정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란 국가와 관련된 공무원의 일이다. 가령 농림부에서 농림부 직원들이 하는 일, 국방부 직원이 하는 일, 교육부 직원들이 하는 어떤 제도적인 것이다. 나는 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직원들은 특별한 절차를 거쳐 선발되고 관료제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이를 폴리스로 가져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일에 내가 참여한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건지 설명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묻는다. 나는 그것에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반대 의견을 반박하며, 결정을 내릴 때 찬반을 표시해야 한다. 주요인물에 대한 재판에도 참여하고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을 할 건지 말건지, 배를 타고 공격할건지 중장보병을 앞세워 육지로 공격해 들어갈지도 모두 나와 다른 사람들이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여 결정한다. 즉 모든 공적인 일에 참여하여 결정권을 갖는 것. 그렇게 행위하며 사는 것. 그것이 고대 희랍이 제시한 정치의 원형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정치사상/철학은 거칠게 말해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 사는 기예'다. 폴리스를 이러저러하게 구성하고 각 구성원이 이러저러하게 행위한다면, 폴리스와 폴리스에서 사는 구성원의 삶을 훌륭하고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진리의 담지자인 철학자 왕이 제도를 창출하고 진리에 기반한 질서를 강제함으로써 폴리스를 재형성하는 것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정체를 검토한 후 각각의 장점을 뽑아 혼합해 운영하는 중용의 방법을 제시했다. 당대의 희랍인들은 두 사람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치사상의 기나긴 여정은 두 사상가의 손에서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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