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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박상훈 역, 후마니타스, 2013)를 다시 읽었다. 새로 구한 책을 다시 읽는다고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인연이 길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김진욱 번역본(범우사)을 읽었고, 졸업하고 나서는 이상율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었으며, 몇 년 전에는 전성우 번역본(나남)을 구해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박상훈 번역본으로 읽었으니 횟수로만 치면 네 번째가 된다.

왜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대자면 어떤 구절에 공명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독일의 모든 정당이 보여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은 향후 정당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가야 할지 또 아직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하나의 직업으로서 정치라는 사업이 외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 막스 베버, 박상훈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 후마니타스, p193 

사실 이 구절은 인상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암울한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독일 정당의 미래와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기 어려운 패전 직후의 상황을 요약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전 책을 읽으며 나는 이 짧은 구절에 깊이 공감했다. 왜냐하면 거부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현실 앞에 놓인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자세였기 때문이다.

베버가 강의할 당시의 독일의 암울한 현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뮌헨 대학에서 일련의 학생들이 베버를 초청하여 이루어진 강연을 활자화한 것이다. 그러나 강연은 평온한 캠퍼스에서 느긋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강연이 실행된 날짜는 1919년 1월 28일이다. 다시 말해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한지 고작 90여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강의인 것이다. 

당시 독일의 현실은 어떠했을까. 역사책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약 25만 명의 사람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1918년 말 독일인의 하루 음식 섭취량은 총 1000 칼로리에 미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감자 몇 개가 이들이 먹을 수 있는 전부였던 셈이다. 산업시설을 돌릴 천연자원이 고갈되었고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무료 배급소로 몰려들었지만, 줄은 너무도 길었고 배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베를린을 비롯해서 라이프지히에 이르기까지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발생했고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았지만, 적절한 수습책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전후 평화회담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패전이 확실시되면서 전쟁을 주도했던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며, 군주를 기점으로 관료와 의회가 축이 되어 운영되던 정치 시스템이 일순간에 붕괴했다. 따라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의회에 의한 공화정이 성립되어야 했다. 그러나 권력을 왕과 관료가 쥐고 있었던 독일 정치권에서 의회의 힘은 미약했으며, 패전의 상황을 수습해 갈 역량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정당은 모든 권력을 의회에 넘겨주겠다는 수상의 제안을 자진해서 거부할 정도였다. 

강연은 이런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굶주린 상태였으며 부랑자가 떠돌고 기아로 쓰러진 시신이 발에 차이는 골목길을 통과해 강의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절실한 질문이 있었다. 이 총체적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은 무엇인가? 베버는 이런 학생들 앞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여기서 왜 정치에 관한 강의였는지를 부연하는 것이 좋겠다. 혼란스럽고 무력한 정치권의 상황이 배경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정치는 지금과는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지식인들에게 있어 정치는 이념적인 측면을 떠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이해되었던 부분이 있다. 세계 1차 대전이 증명하듯 유럽에서는 각국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리고 경쟁의 궁극적 도달점은 전쟁이었다. 전쟁에 의해 국경선이 바뀌고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만큼 국가는 효율적인 조직체로 기능해야 했다. 정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이해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의회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 정치체는 그 이념과 더불어 효율성의 측면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즉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성립된 정부는 국민들의 자발성을 기반으로 한 군대와 이를 유지할 세금을 확보함으로써, 구체제의 국가에 비해 월등하다고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후진적 정치’의 원인을 냉정하게 밝히다

패전 직전까지 독일의 정치체는 의회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군주제였다. 당대 독일의 지식인들은 이를 후진적인 구체제로 인식했으며, 의회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를 도입하지 못해 패전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정치적 선진화를 이룰지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정치를 주제로 강연이 열린 것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버의 강의는 국가와 정치를 정의하고 권력을 짧게 논의한 후 곧바로 직업 정치가와 직업 정치가를 양성할 의회와 정당의 문제로 넘어간다. 베버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현대 의회민주주의는 카리스마에 의거한 데마고그에 의한 정당 정치이며 직업 정치가는 이 토양 속에서 소명을 받은 정치지도자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지도자에게는 필수적인 요소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권력을 획득할 정당(머신)이며, 다른 하나는 머신을 운영하게 할 보상이다. 정당은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보상을 위한 금권정치 또는 관직사냥의 길을 걷게 되며 그 와중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역사적이자 제도적인 토대를 필요로 한다. 

베버는 영국과 미국을 예로 든다. 영국의 경우, 의회제도는 머신을 통해 대중의 의지로 합법화하는 대중 독재의 정치 시스템이지만 위원회와 의회를 통해 유능한 지도자를 선발하는 제도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 안정적인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한편 미국의 경우 낭비적인 시스템이기는 하나 발달된 정당들이 이념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능한 정치 지도자는 정당을 이용하여 행정수반이 될 수 있고 정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뛰어난 정치가가 탄생할 수 있다. 

반면, 독일의 경우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우선 독일의 의회와 정당이 무력하고 행정 관료가 내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이 두 기관을 통해서는 나올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즉 데마고그형 정치 지도자는 추종자들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획득해야 하는데 무력한 의회와 정당은 이런 통로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관료가 장악하고 있는 행정기관은 정치 지도자의 육성을 가로막는다. 또 하나의 원인은 독일의 주요 정당(가톨릭 중앙당, 사회민주당)은 이념적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 중앙당은 신교국가에서 소수인 가톨릭을 내걸었고,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게만 의존하려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소수의 정당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정당은 명사들이 지배하는 길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고, 관료들의 지배에 의존하는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는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베버의 결론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다는 그 구절이다.

“독일의 모든 정당이 보여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은 향후 정당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가야 할지 또 아직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하나의 직업으로서 정치라는 사업이 외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어야 할까

베버의 강연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재 독일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재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발달된 의회와 대중 선거를 치를 정당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할 제도의 발전에는 역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열정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현실이 절망적이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 외에 해결책을 모색할 다른 방법은 없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피하지도 중언부언 하지도 않는 현실주의 지식인의 발언은 당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다시 베버의 책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한동안 유행했던 정치 담론 또는 대중 정치 서적이었다. 그 속에서 정치는 이미 성취되었어야 했을 이상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이상은 단지 가로막혀있는 것에 불과하고 시민들의 열정으로 벽은 손쉽게 무너질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정치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열정과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열정과 이상이 실현되어야 할 현실적 바탕이 무엇이며 어떤 물리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정치, 그리고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춘 ‘소명을 지닌 정치가’(p231)를 바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어보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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