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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가설>>(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최수근 역, 이김 출판사, 2017)을 읽었다. 읽고 나서 관련 서평을 훑어보았는데, 대개가 육아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쓴 평이한 서평이고, 심리학자나 발달심리학 관계자가 쓴 적절한 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보기에, “양육 가설”로 지칭된 발달심리학 이론을 반박하는 이 기념비적인 책은 지금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전문성을 가진 필자에 의해 꼼꼼하게 독해되고 평가될 필요가 있다. 만약 과학이 데이터에 입각하여 이론을 검증/수정하는 활동이라면, 경우에 따라 데이터가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과감히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설계하는 활동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양육가설이 매우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고, 어떤 데이터도 가설을 지지하지 않으며, 기꺼이 가설을 포기할 것을, 그리고 새로운 가설(저자는 이를 집단사회화 이론이라고 부른다)을 세울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유별난 육아서로만 취급받고 읽히는 것은 책이 담고 있는 주장과 함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다. 이 책은 과학 학술장에서 더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술 담론장에 속하지 않은 독자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일반인의 시각에서 논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양육에 관심 있는, 아이를 기르는 한 명의 부모라는 독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여 이 서평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양육가설>>의 핵심을 요약하고 논평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아빠로서 이 책이 주는 함의를 되짚어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육아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가 쓰는 또 한 편의 서평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수준 때문에 이론서가 육아서로만 읽히는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학술장에 속한 연구자의 꼼꼼한 서평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무려나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턴 흥미로운 이 책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양육가설과 근본 전제의 해체

철학자 존 로크가 “빈 서판”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후, 인간의 성장과 양육에 대해 다양한 가설이 등장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인간은 백지로 태어나고, 어떤 교(훈)육을 받는가에 따라 성격이 결정되며,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직관적이며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늘 무언가를 배우고 따라하며, 따라한 행동은 반복되어 습관으로 굳어진다. 아이가 습관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침착하게 대응하는지, 조심스럽게 확인하는지, 아니면 화내며 뛰어가든지)가 아이의 성격이며, 그것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리라는 건 복잡한 추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빈 서판을 채울 최적의 재료가 무엇인지를 두고 첨예한 논의가 벌어졌고, 현대에는 그것이 발달심리학의 연구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알고 있듯이) 그 답은 ‘부모’와 ‘부모가 제공하는 양육 환경’이다. 이것이 저자가 지칭하는 “양육 가설”이다.

물론, 양육 가설은 최적의 재료를 부모와 부모가 제공하는 환경으로 환원하는 단순한 이론은 아니다. 길긴 하지만 전체를 서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양육가설이란, 아이의 성격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각각 50%씩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 하에(p38), 환경적 요인 중 부모가 제공하는 양육 환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며(p61), 양육환경에 포함되는 부모의 태도를 ‘너무 엄한’, ‘너무 부드러운’ ‘바람직한’ 세 유형으로 구분하여 이상적인 양육 태도는 (당연하게도) ‘바람직한’ 유형(p94~95)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더 간단히 줄이자면, 유전적 요소인 절반을 제외하면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을 조성해주는지에 따라 아이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 가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근본 전제가 필요하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저자 주디스 해리스는 양육가설 속에 숨겨져 있는 근본 전제 두 가지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이것을 반박함으로써 “양육 가설”이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그 전제란 다음과 같다. 1) 부모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양육환경은 늘 일관되(어야 하)며, 그 영향력은 항상 부모에게서 출발해 아이에게 도달하는 단방향적인 것이지 반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2) 양육환경에 의해 형성된 아이의 성격은 항상 일정하며, 어떤 맥락 속에 놓이든 일관성을 가진다. 하여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도식이 그려진다.

부모 → 아이

(강조는 영향력을 미치는 주체)

저자의 첫 번째 반박을 살펴보자. 전제 1)을 반박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느 날 저자가 기르는 개가 갑자기 인도로 뛰쳐나가 짖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인도에는 한 엄마가 어린 남매 둘을 데리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상이했다. 여자아이는 개가 짖고 있었음에도 호기심을 느끼며 “엄마 만져도 돼요?” 라고 물으며 개에게 다가갔고, 남자아이는 겁을 먹은 채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 불안한 표정으로 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 둘을 대하는 엄마의 말은 달랐다.

아이의 엄마는 ”안 돼, 오드리. 개는 네가 만지는 걸 싫어할 걸“이라고 대답했다. 반면에 (...) (남자아이에겐- 인용자) ”얼른 와, 마크, 안 물어“라고 말했다. (p67)

이 에피소드는 양육환경이 일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육아서나 육아 강연회에서 얻는 조언 중 하나는, ‘항상 사려 깊게 살펴보고, 아이에게 공감하며, 다정하게 대하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아이가 격앙된 감정상태일 때를 설정하고 이를 차분하고도 부드럽게 다루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상황극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부모가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이런 일관성은 지켜질 수 없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양육태도’는 부모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본성, 즉 성격적 특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불안을 잘 느끼는 타입이라면, 부모는 부드럽게 말하고, 요구를 허용하고, 안전하고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양육 태도를 보일 것이다. 반면, 아이가 대담하고, 고집스러우며,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떼를 쓰는 타입이라면, 이 아이에게는 ‘바람직한 양육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아이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요구를 허용하는 순간, 아이는 순식간에 공을 들고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로 뛰어들던지, 주인과 산책하고 있는 거대한 사냥개에게 달려가 덥석 안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식초를 한 컵 원샷하려 들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양육태도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양육태도는 아이의 본성에 따라 부모와 아이 간에 벌어지는 복잡한 쌍방향 피드백이다. 그렇다면, 전제 1)은 무너지고 만다. 부모의 양육태도는 일관될 수 없고, 단방향적이지도 않다. 부모의 양육태도는 가변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이 결론의 놀라운 점은 주도권을 부모가 쥐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양육 태도가 아이의 본성에 반응한 부모의 피드백이라면 실제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므로 도식은 이렇게 그려지게 된다.

부모 ↔ 아이

(강조는 영향력을 미치는 주체)

전제 2)를 공격하는 두 번째 반박은 전제에 대한 반론이면서, 논의를 새로운 가설로 이끌어 가는 발판이 된다. 전제 2)는 형성된 아이의 성격이 맥락에 관계없이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가 언어를 획득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우회하여 전제를 반박하는 방식을 취하는데(p116~126), 여기서는 아이의 성격이 일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예를 하나 검토하는 것이 더 간결할 것 같다. 그 예는 바로 우리 아이다.

우리 집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에 해당하는 남자아이가 하나 있다. 그런데 이 꼬마는 어찌나 소심한지 마시던 컵에 날벌레가 앉으면 바로 컵을 씻고(벌레가 앉은 곳은 병균이 있을 테니까), 처음 보는 반찬은 손도 대지 않으며, 새로운 도구가 생기면 매우 조심스럽게 건드려보면서 사용법을 익혀 나간다. 나가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수영은 질색하며, 집에서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즐겨본다. 친구들과 놀러 나갈 때는 오직 금요일 하루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가끔 시답잖은 익살을 부리거나 약간 비하하는 농담(그러니까, 야 이 새꺄! 이걸 이따위로 하면 어떻게 새꺄, 하는 식이다)을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새꺄라고 부르지 마, 라고 하면서도) 짜증도 내지 않는다. 한 번은 화가 날 정도로 놀려보았지만, 끝내 화를 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학교에서 누군가 놀리면 그냥 놀림을 받으며 있는 스타일이랄까. 집에서 우리 아이의 모습은 항상 그러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아이의 성적보다, 저 소심한 성격으로 누구와 주먹다짐이라도 하게 되면 영락없이 두들겨 맞고 오는 건 아닌지, 어쩌면 몇 가지 불상사가 겹쳐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하는 편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니 담임선생님이라면서, 아이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나에게 연락했다는 거였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예상대로 같은 학우와 ‘다툰’ 사건이었다. 나는 즉각 그 나이또래에 할 법한 애들 주먹다짐을 연상했고, 우리 아들이 맞았으리라고 짐작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저 아버님, OO(우리꼬마)이가 XX(때린꼬마)와 체스를 두다가 너무 여러 번 이기니까, XX가 OO이를 때렸는데요...” 생각했던 바였다. 피가 났는지. 심하게 맞았는지.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은 건 여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예상을 넘어섰다. “그런데 아버님, OO이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는데, 맞은 다음 못 때리도록 막고는 독설(욕설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을 XX에게 매우 심하게 퍼부었어요. 얼마나 심한 말을 들었는지 XX가 그만 울고 말았는데, 그것 때문에 학급 아이들에게 놀림까지 받았고요. 그 때문에 XX가 집에 가서도 울고, 다시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있데요. 사실 XX가 잘못한 건데, OO이가 워낙 심하게 대해서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으니, 서로 사과할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훈계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독설(아직도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을 퍼부어서 상대를 울게 만들었다고? 뜻밖이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어서 나는 선생님께 우리 꼬마가 집에는 얼마나 소심하고, 놀려도 반응하지 않는지, 그리고 얼마나 체력도 약한지, 그래서 아이들에게 소심하다고 놀림당하거나 왕따를 당할까 걱정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하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 아버님, OO이가 왕따요? 전혀 아니에요. 그럴 수가 없어요. 학교에서는 활발하게 지내요. 물론 체육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몸을 많이 쓰는 게임 같은 걸 싫어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 약골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는 아니에요. 게다가 공정함에 굉장히 민감해서, 공정하지 않으면 아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꼬치꼬치 캐묻고 따져요. 아이들이 공정한 심판이 필요하면 OO이만 찾는데요. 그런 아이가 왕따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요컨대, 우리 꼬마는 집에만 오면, 몸을 움직이는 것에 혐오감을 품는 귀차니스트에 소심덩어리였다. 그러나 학교에선 독설을 퍼부어 상대를 제압하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을 확보하고 있는 공정함의 화신이었다. 이 이중성이 납득이 가는가? 저자 주디스 해리스는 이것이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며, 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맥락’에 따라 자신의 성격을 바꾼다. 그것도 자유자재로 바꾼다. 집이라는 맥락에서 나타난 성격은 학교라는 맥락에서 다른 모습을 취한다. 이것은 학습의 결과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인간 본능이다.

사회적 맥락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는 현상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에게서 또한 관찰되는 패턴이다. 연구자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관해 어머니들이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또 어린이집에서의 행동은 직접 관찰하거나 선생님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여 연구를 실시했다. 그리고 아이의 행동에 대한 두 데이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연구자는 ”아이의 실제적 행동은 집과 어린이집 사이에 체계적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인정했다. (p113)

여기서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은 집이라는 맥락 속에서 인생을 보낼까 아니면 학교 같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인생을 보낼까? 당연히 답은 후자며, 이는 전제 2)를 무너뜨린다. 집에서 부모가 형성시킨 성격(물론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이야기다)은 결코 ‘일관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맥락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며, 오히려 본질적 성격은 사회적 맥락에서 나타난다. 결국 아이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양육환경과 부모의 역할은 미미하든가 (과장하자면) 기여하는 바가 없게 된다. 결국 부모에게 빗금이 그어지고 도식은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된다.

부모 (미지의 성격결정 요인) 아이

후일담을 말해두면, 소심덩어리에 귀차니스트인 우리 꼬마는 선거에 출마, 무난하게 회장(반장)에 선출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믿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또래 집단과 성격의 형성

근본 가정이 유지될 수 없고 그 때문에 양육가설이 붕괴된다면, 문제는 이제부터다. 부모와 양육환경이 아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아이의 성격을 결정할까? 도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빗금이 쳐진) 부모 대신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 저자 주디스 해리스는 잘라 말한다.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은 부모가 아니다. ‘또래 집단’이다.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이며, 더 정확하게는 동급생이자 같은 성별을 지닌 아이들이다. 아이의 성격은 또래 집단과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주디스 해리스는 이 과정을 ‘집단사회화’라고 부르며,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저자는 집단사회화의 요인을 두 가지로 잡고 있다. 첫 번째, ‘또래 집단’이다. 아이는 또래집단에 소속되면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또래 집단과 성격의 형성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힘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힘은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 약 600만년에 걸친 진화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무리 짓기 본능이다.

포유류는 대체로 무리지어 산다. 그러나 무리 짓지 않고 사는 포유류도 있다. 예컨대 호랑이는 무리를 짓지 않는다. 호랑이는 단독으로 영역을 나누어 살지 집단을 꾸리지 않는다. 무리를 지어 보라고 같은 공간에 여러 마리의 호랑이를 넣어두면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이고 때로는 상대를 죽이기까지 한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유인원인 침팬지는 무리를 짓지 않으면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본능적으로도 그렇다. 어린 침팬지를 무리에서 억지로 분리시켜 놓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우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사회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죽음을 택할 만큼 ‘강력한 본능’이다. 저자 주디스 해리스는 우리 인간에게 이 강력한 본능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성격은 자연과 진화가 부여한 사회화의 힘이 아이 하나하나에게 작용한 결과다. 따라서 근본적 힘인 ‘사회화 본능’을 두 번째 요인으로 넣을 수 있고, 이 힘은 ‘또래 집단’과 ‘아이’에게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도식은 이렇게 그려지게 된다.

또래 집단 아이

(사회화 본능)

사회화 본능은 사회화를 위한 네 가지 장치를 활용한다. 1) 범주화(p205) 2) 동화(p207~208) 3) 모방(p241~246) 4) 차별화(p265~270) 다.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간단한 장치들이다. 범주화란 대상을 파악하고 구분하는 기능을 뜻한다. 사과, 쌀, 초콜릿, 김치 등은 ‘먹을 것’으로 묶고, 신발, 옷, 바퀴벌레, 책등은 ‘먹지 못하는 것’으로 묶는, 그런 분류기능이다. 인간은 분류를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건 우리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주목할 것은 사회화가 이루어질 때 본능이 ‘우리/그들, 나와 비슷한/나와 다른’ 같은 유사함/차별됨의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이며, 여기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그것은 나이와 성별이다. 사람은 우선 나이를 기준으로 분류하고, 다음으로 성별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즉 어떤 아이에게 어른과 아이의 두 집단을 보여주고 마음에 드는 쪽을 고르라고 하면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 집단을 선택하며, 집단 속에서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을 보여주고 고르라고 하면 같은 성별의 집단을 택한다. 이것이 최초의 시작이다.

일단 범주화가 이루어지면 아이는 ‘우리’라고 생각되는 쪽, 즉 ‘나와 비슷한’ 범주로 분류된 집단에 소속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것이 ‘2) 동화’다. 그리고 그 집단이 보이는 행동/특징을 ‘3) 모방’한다. 주디스 해리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 결과를 여럿 보여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발달 심리학자 캐롤 애커먼과 샤론 디도는 엄마와 함께 장난감이 많이 있는 방에 온 아이들끼리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들려주었다. 낯선 어른에게 경계심을 품을 만한 때인 한 살배기 아기들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짓고 부정확한 말로 종알거린다. 어떤 아기는 다른 아기에게 장난감을 주거나 다른 아기로부터 장난감을 건네받는다. 가까이 앉은 아이들은 때로 서로를 부드럽게 만져주기도 한다. 가끔은 그 접촉이 거칠고 장난감을 두고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아기들은 대체로 잘 지낸다. (...) 실험실의 두 낯선 아기가 서로를 모방하기 시작하는 것은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다. 처음에는 나란히 앉아 상대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는 단순한 놀이를 한다. 한명이 공을 집어 들면 다른 한 명도 공을 집어 든다. 공이 하나밖에 없으면 다른 아기는 먼저 공을 집어 든 아이에게서 공을 빼앗으려 하기도 한다. 두 살이 되면 모방은 더욱 정교하고 흥미진진해진다. 아이 하나가 방을 뛰어다니거나 장난감 두 개를 서로 맞부딪히거나 혹은 탁자에 걸려 넘어지거나 탁자를 핥는 등 우스운 행동을 하면 그것을 본 다른 아이도 그대로 따라한다. (...) 이러한 모방 놀이는 몇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 끝나지만, 아이들은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굉장히 즐거워한다. (p228~242)

모방이 어떻게 성격으로 이어질까? 이를 이해하려면 ‘성격’이 무엇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격을 어떤 인물이 지닌 속성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느긋하다든지 성마르다든지, 성급하다든지, 사려 깊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물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속성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격은 인물이 보이는 행위를 종합하여 지칭하는 어휘다. 즉 늘 서두르고 급하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성급하다’고 부르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느릿느릿 움직이며 늦어도 걱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느긋하다’고 부른다. 먼저 ‘속성’이 보이고, 그 다음에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에 성격이 어떻다고 평가하는 게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성격이란, 인물이 보이는 ‘경향성’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아이가 어떤 집단의 어떤 행위를 모방하는가, 그래서 어떻게 ‘행위’하는가는 성격 형성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된다. 저자는 이를 다음의 말로 요약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고 그 집단의 행동과 태도, 어법, 복장 등을 받아들이면서 올바른 행동에 대한 생각을 얻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대부분 자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밟아간다. (p256)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만약 어떤 학급의 아이들이 항상 거칠게 행동하고, 타인의 것을 함부로 뺏고, 뺏지 못하면 때려서라도 강취하는 폭력을 빈번히 행사한다면, 그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며 행동하는 아이는 어떻게 할까? 아이는 학급아이들을 모방하여 거칠고 폭력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떼를 쓸 것이고 뜻대로 안되면 화를 낼 것이다. 왜 그렇게 거칠게 행동하느냐고, 부드럽게 요구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아이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드럽게요? 어우 끔찍해. 전 성.격.상. 절대 그렇게 못해요.” (인간 심리를 어떤 고정된 실체, 그리고 행위를 유발하는 원천으로 보지 않았던 고대인들은 행위에 의해 성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통찰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성격은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고(<<니코마코스 윤리학>> 1103b 20-25) 이야기 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최종 주장은 훌륭한 행동을 반복해야 훌륭한 성품(격)을 지닌 인간이 되니, 늘 훌륭한 행동을 하도록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아이들이 또래집단을 모방하고 그것이 성격을 형성한다면, 왜 똑같은 또래 집단에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생기는 것일까? 왜 똑같은 집단에서 아이들은 다 성격이 다를까? 저자는 이를 ‘4) 차별화’로 설명한다. 아이들은 또래 집단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해 차별화를 시도한다.(p266) 다르게 말하면, 아이들은 집단 내에서 더 주목받기 위해 경쟁한다. 그 때문에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현저하게 만들어 발전시켜 나간다. 가령, 외모가 빼어난 아이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공부에 매진하며, 체력이 좋은 아이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식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집단 내에서 어떤 위치(저자는 위계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를 차지하게 되며, 그것이 성격적 특징을 강화시킨다. 가령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며, 차분하게 노력하는 성격을 획득하게 될 확률이 높고(물론 경쟁심이 과해져 자주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작용도 생길테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하는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에게 손부터 올라가는 성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친구로서는 더없이 듬직할 것이다. 일진(?)을 친구로 둔 아이가 왕따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저자의 집단 사회화 이론은 많은 것을 이해하도록 해 준다. 왜 아이가 집에서는 편식을 하면서도 어린이집에서는 식판을 싹싹 비우는지, 왜 학교로 진학하면 성격이 바뀌는지, 학교 선생님과 상담하면 왜 깜짝 놀라게 되는지, 나아가 또래 집단과 교류하지 못하고 자라난 천재는 왜 비정상적인 말년을 맞는지, 반대로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외부모 집안에서 자라고, 경우에 따라 고아로 자라면서도 성공신화를 만들 수 있는지까지. 책이 보여주는 논리와 사례,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하고 강력하다. 하여 우리는 아이의 성격을 결정하는 마지막 도식을 완성하게 된다.

또래 집단 아이

(사회화 본능 : 범주화, 동화, 모방, 차별화)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저자의 주장을 정리해보자. 부모의 양육태도나 환경은 아이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주요인은 또래 집단이며,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작용 (범주화 -> 동화 -> 모방 -> 차별화)에 의해 아이의 성격이 형성된다. 이건 의식적이지도 않다. 진화가 부여한 본능적 작용으로,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덧붙이면 주디스 해리스는 이 과정이 유년기 중반, 대략 초등학교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 이후에는 대체로 성격이 고정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결론은 양육자의 짐을 덜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부모는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선고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과학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의사 결정봉을 정확히 세 번 두드린다.) 엄마로부터 태어났고, 울고 보챘고, 환히 웃었고, 장난감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해졌고, 달리기 시합을 하면 미친 듯이 달려 아빠를 이겼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방방 뛰던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오로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장식품으로 전락해 지켜만 봐야 하다니! 특히나 모든 것에서 방법론을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매진하면 무조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무기력함’은 죄악에 가깝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아이에게 '최상의 성격을 형성시켜줄 최적의 또래 집단'을 찾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밝히듯 최적의 또래 집단이 무엇인지 연구한 데이터는 없다. 그러나 참조할만한 가설은 있다. 바로 말콤 글래드웰의 <랭건과 오펜하이머의 결정적 차이> 다.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노정태 역, 김영사, 2009. p112~138)

말콤 글래드웰은 두 천재를 소개한다. 한 천재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고, 다른 하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는 대학을 중퇴했고, 미주리의 교외에서 자신의 이론을 연구만 하고 있다. 반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최상의 발명일지, 최악의 발명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업적인,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흥미로운 건 말콤 글래드웰이 이 둘의 차이가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그는 경제력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집중 양육”의 유무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집중 양육이란 아이에게 수준 높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빡빡한 일정을 수행하도록 하며, 도전과제를 주고 이를 달성하도록 압력을 주는 양육방식을 뜻한다. 집중 양육을 받는 아이들은 사립학교를 다니며, 사립학교는 그러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교육과정을 시행하고, 이런 교육과정 받은 아이들은,

빡빡한 일정 속에서 (...) 매우 다양한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팀워크를 배우고 고도로 짜여진 구조 속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들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방법도 익히고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 말하는 법도 배운다. 라루의 표현에 따르자면 중산층 자녀는 ‘권한’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p128)

반면, 집중 양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리를 두고 행동하며 신뢰하지 않고 저항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들은 어떤 환경에 놓이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혹은 라루의 환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최적화’하는 방법을 모른다.”(p128)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의 천재(랭건)는 자신의 천재적인 이론을 발표해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교외 외곽에서 ‘연구만’ 하고 있으며, 다른 천재(오펜하이머)는 정부의 가장 높은 관료들 앞에서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여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삶이 더 좋았을까? 당연히 후자다.

이를 집단사회화 이론에 응용해 보면 이렇다. 어찌되었건 학교는 대치동으로, 그리고 학원 뺑뺑이(?)도 기꺼이 시켜야 한다. 집중양육의 환경 속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또래 집단’에 속하는 것. 그것이 아이가 권한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의견을 최대한 관철시켜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 있는 성격을 획득하는 길이다. 물론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역시 교육특구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가설이 있다. (이렇게 얄궂을 수가 없지만) 그 가설을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말콤 글래드웰이다. 최근작인 <<다윗과 골리앗>>에 수록된 <아웃사이더의 자아관념> (말콤 글래드웰, 선대인역, 21세기북스, 2014. p86~121)에서 그는 경쟁적이고 우수한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어떤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는지 이야기한다.

글래드웰은 두 도표를 제시한다. 한 도표는 아이비리그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학생들의 논문 수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면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끔찍하게 생각할 정도로 바닥권 순위인 30위 이하의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학생들의 논문 수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아이비리그 출신들은 “형편없”고, 바닥권 대학 출신들은 “모든 학생들보다 상당히 더 좋은 실적”을 낸 것으로 나타난다.(p110~114) 왜 그럴까? 저자에 따르면 “큰 연못은 정말로 뛰어난 학생들을 데려가서는 이들의 기를 꺾어”(p114)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수한 집단속에서 개인의 겪어야 할 “상대적 박탈감”이다. 우수한 집단 속에서 경쟁은 극대화되며, 최상위권 몇 명만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과를 낸다. 그 결과 집단에 소속된 ‘일반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최상위권에 소속되어 자부심과 자신감에 가득찬 시기를 보냈을 사람들이 결국 경쟁을 포기, 완전히 다른 길로 전향하고 만다. 저자는 하버드에서 박탈감을 겪은 랜돌프란 학생을 인용한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랜돌프는 로스쿨 입학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 졸업 후 그는 맨해튼의 법률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하버드는 세상에서 한 명의 물리학자를 빼앗아가는 대신 한 명의 변호사를 세상에 선사했다. 랜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법을 다룹니다. 웃겨요.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결국은 세법 전문가가 된 사람이 꽤 많이 있죠.“(p121)

이 가설을 또래 집단에 응용하면 이렇다. 아이를 가급적이면 경쟁이 심하지도, 공부에 전념하지도 않는 학교에 보내는 게 유리하다. 또래 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진로를 포기하고, 내가 의지하는 바는 나보다 뛰어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만다는 충격을 경험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면, 또한 자신이 또래 내에서 뛰어난 학생이라고 느끼며 자신감과 능동적인 성격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면, 대치동이나 교육특구 같은 곳은 피하는 것이 정답이다. 오히려 ‘대치동 출신이라면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끔찍하게 생각할 정도로 바닥권 순위인 30위 이하의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로 변해버려야 할 것 같은 역설 속에서 며칠 동안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고민했음을 밝혀야겠다. 교육특구? 아니면 경쟁 없는 행복한 학교? 집중양육? 아니면 박탈감을 피하는 교육방법? 몇 시간에 걸쳐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왼쪽으로 기울었고, 동료나 친구 몇 명을 만난 자리에서 묻기도 했으나 대답은 정확하게 반반이었다. 절반은 ‘그래도 대치동이지, 잘 안 되도 평균이상은 가는 거 아냐.“ 라고 했고, 절반은 ”확실하지도 않은데, 학원 뺑뺑이에 교육 지옥에서 애들 상처받아. 너무 심한 곳은 곤란해“ 라는 답변을 했다. 왼쪽에는 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건초가 있다. 문제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양쪽 사이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허기진 당나귀가 되어 퀭한 눈으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낸 책의 뒷부분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그리고 구원을 얻었다.

<<양육가설>>의 저자 주디스 해리스는 아이의 성격을 부모가 결정할 방법이 없다고 단언한다. 또래 집단이 아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세한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 연구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읽으면, 아이의 성격이 “운이 좋으면 꼭대기에 앉고, 운이 없으면 바닥에 앉는다”(p270)는 걸 인정하라는, 즉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세세히 알고 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느낌이다. 주디스 해리스는 성격형성 과정이 ‘수동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수동성이 ‘자유’와 ‘주체성’을 부여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나라는 인간이 우리 부모가 기획한 양육환경에 따라 조립된 것이라면, 즉 나의 특성, 성격, 고난에 대응하는 자세, 선호하는 이상형이 모두 기획된 것이라면, 과연 ‘나’는 주체성이란 걸 갖고 있는 걸까? 오히려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조절할 수도 없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진정한 ‘주체성’ 이고, 부모의 ‘기획’에서 벗어날 ‘자유’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그녀의 마지막 결론을 읽으며 나는 ‘적당히’, 그리고 반쯤은 ‘수동적’(그러니까 운에 맡겨보는 식)으로 우리 꼬마를 기르기로 했다. 궁극적으로 운은 공평하다는 것, 그리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미래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라면, 그것은 우리 꼬마에게도 기꺼이 주어져 있을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얼마나 좋은 성격을 형성하는가는 잘 될 수도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건 “운에 달려” 있다. 하지만 결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 인생은 아이의 것이며, 미래로 걸어 나가는 건 아이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움직였던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착각에 불과하다. 이제 내려놓자. 아이들은 부모의 꿈을 칠할 빈 캠퍼스가 아니다. 조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자녀를 사랑하되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 양육을 즐겨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라. 긴장을 풀어라.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지는 당신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았는지를 반영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최수근 역, 이김 출판사, 2017.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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