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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겸손함의 매력

빵가게제빵사 2019. 4. 24. 21:46

<<사악한 책, 모비딕>>을 읽었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겸손함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루면서도 고전적 해석을 내걸지 않고, 획기적 해석을 시도하지 않으며, 소설이 은유하는 삶을 과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입에 넣고 굴리는 생율같다고 할 수 있다.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삼킨 후에 잔향이 입에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떠오르고 음미하게 된다. 그런 책이다.

나는 이 책이 문체나 사고, 진행방식의 특출함으로 어필하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체/사고/진행방식 모두 평이하다. 오히려 이 책은 자신의 장점, 그러니까 겸손함의 매력을 다른 곳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조합이다. 오늘은 이걸 이야기해 보자. 그러기 위해 나는 12장 <천국이 존재하는가>를 고르겠다.

<천국이 존재하는가>에는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하나, 범용한 독자와 저자의 삶이다. 작가는 상투적인 어휘를 사용해 이를 지시한다. "이 삶에서 사랑하고 일하고 행복해 한다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세상에서 쇠락과 죽음 말이다.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끝이 나며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의 저주다." 그러하다. 너무도 당연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여기서 작가는 두번째 층위, <모비딕>의 에이해브를 끼워넣어 호기심을 슬쩍, 흘린다. "이 진실을 인지하고 직접적으로 내면화한다면, 에이해브처럼 미치게 된다."

그리고는 단숨에 이슈메일로 건너뛰어 영원에 대한 단조로운 의심을 보여주고, 다시 에이해브로 돌아온다."아무리 모든 세속적 동물적인 것을 초월하려고 해도 결국 에이해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다리 늙은이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에이해브와 이슈마엘을 비교하게 된다. 초월을 추구해 모비딕을 쫓은 에이해브는 비루한 삶을 살았고, 결국 흰고래에게 포박되어 삶을 잃는다. 하지만 영웅적으로 죽기는 했다. 반면 초월을 추구하지 않았던, 초월을 추구하는 영웅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던 이슈마엘은 구조되어 삶을 회복했다. 하지만 영웅적으로 죽을 기회는 잃었다. 누구의 삶이 좋은 걸까? 하지만 이것은 가짜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해브보단 이슈마엘처럼 산다. 따라서 에이해브는 미치광이로 여겨진다. 초월은 가능하지 않아, 에이해브가 물에 잠기는 장면을 떠올리며 독자는 고개를 젓는다.

작가는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세번째 층위를 삽입한다. 바로 모비딕의 저자 멜빌의 삶이다. "멜빌도 그랬다. 충족되지 않는 야망을 가진 작가지만, 자기 책을 출간하고 읽어줄 평범한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쓰고 싶은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돈이 안 된다고요. (...) 최종 결과물은 잡탕이고, 내 책은 전부 망작입니다. 본질적으로 생명이 이렇게 짧은 현대의 책을 정교히 다듬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출간된지 15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모비딕>을 읽는다. 멜빌은 죽은 뒤에 약속의 땅에 도달한 셈이다. 멜빌은 우리의 문학적 신전에 모셔진 신이다."

멜빌이 성취한 역설을 통해 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독자에게 묻는다. 멜빌은 살아서 초월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죽어서는 초월하여 '신'이 되었다. 에이해브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던 우리는 옳았던 걸까? 작가는 아주 넌지시 묻는다. 왜냐하면 곧바로 돌려나와 멜빌이 꿈꾼 초월, 신이 된 멜빌이 보낼 일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1851년 여름, 고래잡이 소설을 마무리 하려고 애쓰며 멜빌은 자기와 호손이 작가들의 천국에 함께 있는 상상을 해 본다. (...) "영원한 여름인 천상의 풀밭 위에 천상의 다리를 서로 엮고 우리 잔과 머리를 맞부딪쳐 소리를 맞추어 아름답게 울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과거의 삶을 회상하면서, "아 세상이라는 저 작은 구멍에서 살던 때" (...) 같은 제목을 지을 것이다." 신이 되어 한다는 일이 고작 피크닉에서 현세를 회상하는 것이라면, 과연 초월은 (에이해브처럼 삶을 버려가면서까지)선택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작가는 여기에 답을 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답이 아니고 풍경이다. 마지막에 들어서며 작가는 우리의 범용한 삶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멜빌의 여러 갈망에서 비롯된 천국(은).... 우리 모두가 품은 갈망이며, <<모비딕>>의 책장마다 담겨 있는 갈망이다." 초월이 무엇이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우리는 모두 그것을 갈망한다. 이제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인간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사악한 책, 모비딕>>은 이런 책이다. 거기엔 깊은 사유가 없고, 개성적 문체가 없고, 삶에 대한 과장된 진실이 없다. 하지만 그 셋을 겹쳐 풍부하고 깊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원형을 그린다. 우리의 삶에서 출발해서 모비딕의 인물들로 들어가고 작가 멜빌의 삶으로 삽입된다. 그 후 다시 우리네 삶으로 돌아온다. <<모비딕>>이 그랬고, 모든 문학 에세이가 그랬고,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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