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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분별없는 열정>>(마크 릴라, 서유경 옮김, 필로소픽, 2018)을 읽었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하이데거부터 데리다까지, 철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든 20세기 지식인의 삶을 검토하며, 진리의 열정을 전제정치의 불쏘시개로 타락시키는 지식인의 불장난을 명쾌하지만 오싹하게 묘사한다.' 물론 완벽한 소개는 아니다. 철학이 정치와 결합하며 전제의 도구로 타락하는 필연성과 교훈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가르침을 덧붙이면 이렇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자(지식인)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지 않은 채 신중함 없이 정치에 뛰어들어선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시라쿠사의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가 지닌 속성을 추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을 논하려면 정치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에서 케네스 미노그의 <<정치>>를 참고해보자. 케네스 미노그에 따르면 정치의 반대말은 '전제'다. 즉 통치자의 생각과 명령에 의해 모든 갈등이 일방적으로 처리되는 공적 상태다. 반면 '정치'는 자유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가치관에 의거해 타자와 갈등을 벌이는 공적 상태를 뜻한다. 즉 정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의지같은 하나의 근원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상황이 필수불가결하다. 여기서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의 모순이 도출된다. 


정치는 자유인들이 타자와 벌이는 갈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갈등에는 화해될 수 없는 근본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가령 개인의 이익과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과 자유는 제약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충돌하는 지점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갈등을 해결할 완전무결한 원리가 필요해진다. 이것이 '일자적 원리'다. 그러나 일자적 원리를 적용하여 모든 이가 똑같이 행동하도록 강제하면 자유가 사라진다. 이것이 정치의 모순이다. 정치는 원리를 필요로 하지만, 원리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정치 자체가 말살된다. 다시 말해, 정치에는 일자적 원리가 도입되는 범위와 강도에 있어 극도의 신중함을 필요로 한다. 이 범위와 강도가 '정치적인 것'을 규정한다.


이 상황을 일자적 원리에 적용해보자. 일자적 원리란 철학이나 신학의 계시같은 보편적이자 절대적 진리다. 보편적 진리란 어떤 사태에 이르러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원리를 적용해 갈등을 처리하고, 갈등을 야기한 인간을 한치의 어긋남없이 행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는 진리의 보편적 완전무결함 때문에 '전제'가 된다. 진리를 발견/발명 했다고 믿는 세기의 지성이 정치에 뛰어들때 전제정의 비극이 시작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철학/신학자는 자신의 진리를 실현해 줄 강력한 통치자를 찾게 되며, 통치자는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철학/신학자의 진리를 실현해 줄 막강한 권력과 의지,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통치자는 '참주'(독재자)밖에 없으며, 전제 정치의 불가피성 속에서 철학/신학자는 자신의 열정을 전제의 보잘것없는 불쏘시개로 태워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 전제정의 이론적 동조자이자 저열한 옹호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크릴라가 보여주는 풍경이 이것이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전제정의 토대로 전락하는지 지식인의 초상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아주 공정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푸코와 데리다-그리고 코제브까지 포함해서-는 어떻게 평가해도 전제정에 동조한 철학자라고 할 수 없다. 이들에게 가해질 비판이란 정치와 진리의 미묘한 경계, 즉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신중함 없이 함부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릴라는 전제정에 협력한 하이데거와 슈미트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데리다나 푸코 역시 기회만 있었다면 충분히 전제정에 뛰어들었으리라 암시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책이 철학과 정치, 철학자와 정치가, 지식인의 사회참여,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물론 저자는 언뜻언뜻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보이고 있지만, 성질급한 독자들이 만족할만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는다. 답은 독자가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이 이상의 입문서는 없다. 저명한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빼어난 수작이다.


이 책은 10여년 전에 출간되었던 책을 개정하여 다시 낸 것이다. 마크릴라가 2016년에 작성한 에필로그가 첨부되었고, 일부 어색한 문장이 수정되었다. 하지만, 개정된 번역에 아쉬움이 남는다. 본래 번역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역을 필요로 하는 부분들이 개선되지 않았다. 약간의 오역도 그대로 남았다. (일례로 코제브를 다룬 부분에서 크세노폰의 <<Hiero(히에론)>>을 <<영웅들>>로 번역한 부분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도 세심하게 검토되고 수정되었으면 독자는 더욱 기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기에 무리없는 번역이며, 원저의 명성을 손상하지 않는 번역이다. 책을 읽는 독자는 저자의 탁월함을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책으로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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