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Reviews

우리가 만나야 할 타자의 모습

빵가게제빵사 2017. 11. 28. 14:59

들뢰즈는 세계를 특정한 흐름이 자각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는데, '지속'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으면 레비나스의 '있음' 개념과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다. 레비나스의 '영원'은 시작과 종말이 제거된 '현재'의 무한적인 지속인데, 이 지속의 경험이 바로 '있음'이다. 레비나스의 예를 쫓아간다면 불면증의 경험이 이것에 해당한다. 불면증은 소위 '잠드려고 하는 상태'다. 잠들려고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잠'이라는 어떤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거기엔 시간개념이 없다. 단지 '잠'이라는 어떤 상태를 몽롱하게 의식하는 것만이 끊없이 이어지는 일종의 반-능동/반-수동의 경험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힘의 장'이라고 부른다. '있음'은 하이데거가 묘사하는 존재자의 가능성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를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힘'의 무한적 지속이다.그 때문에 레비나스는 '존재자'의 탄생을 '존재'를 유지하는 순간이 아닌, '존재'에서 벗어나는 순간으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존재의 무한'을 '찟는' 순간 '존재자'는 자신을 각성하고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중적인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존재자'는 '존재'에서 벗어나야만 '존재자'로서 자기 각성할 수 있다. 동시에 '존재자'는 '존재'를 자신의 속성으로 받아들여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존재자가 '존재의 무한'에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적 차원을 도입해야만, '존재'로부터 떠나서 다시 '존재'로 돌아오는 시간적 차원을 개입시켜야만 가능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유한성은 존재자의 결점이 아니라 존재자의 조건이다.

 

존재자는 물질적이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본다. 존재자는 존재의 시작이후부터 자신을 둘러싼 '사물'(물질) 속에서 대상을 경험하고 느낀다. 이것이 '향유'다. 그런데 향유는 이중적 특성을 지닌다. 향유는 존재자의 자각('내가' 이것을 느낀다.)과 존재자의 망각 (내가 '이것을' 느낀다)을 모두 포함한다. 존재자는 이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야로 세계와 사물을 재편해나간다.(의미화 작업) 그렇게 일정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존재자의 욕구며 본능이다. 그런데 존재자에게는 풀 수 없는 문제의 순간이 있다. 바로 '죽음'의 문제다.

 

'죽음'은 존재자를 가로막으며 정지시키는 순간이다. 존재자는 자신의 '할 수 있음'을 통해 자신을 '주체'로서 정립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그런 영역을 넘어선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죽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음을 걱정하지 말고 평온하게 지내라는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조언인데) , 이 말에 따르면 죽음은 절대로 존재자가 의지적으로 '선택'하거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언제 올지 알 수도 없고, 순수하게 능동성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고 해도 '죽음하다'라는 능동성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맞이하는 순간 모든 존재자의 능동성을 정지시킨다. 주체에게 완벽한 수동성을 강제하고 '할 수 있음'을 정지시키는 순수한 부정. 완벽한 무력함의 순간. 이것이 바로 죽음의 문제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 죽음의 순간을 '주체'의 구원의 가능성으로 음미한다. 존재자는 자신의 시야로 세계와 사물을 재편해 나가며 '주체'로 성립한다. 그런데, 주체에게 이것만이 허용되어 있다면 이는 완벽한 나르시시즘으로의 결박을 의미한다. 세계는 오직 존재자의 시야에서만 존재하고 존재자의 시야로만 제약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가 없다. 그런데 '죽음'은 이 '주체'의 능동성과 세계를 일순간에 정지시키고 완벽한 '수동성'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주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타자성'의 섬뜩한 순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주체의 이런 '유한성'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적인 '고독'을 해방하는 '신비'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죽음의 이런 가능성을 '타자'로 치환한다. '타자'는 결코 주체의 '시야'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관용으로 이해되고 파악되고 합일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으로는 '타자성'이 유지될 수 없다. 납득되지 않는 것, 주체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 그래서 그 자체로 남아 내 존재를 흔들 수 있는 불길한 중핵처럼 남아있는 것. 그것이 바로 '타자'며 '타자성'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타자'를 통해 칸트와 지젝의 숭고를 경유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는 결코 공포스럽지 않다. 만약 '타자'가 절대 손댈 수 없는 어떤 절대 강제의 순간, 죽음의 순간과 동일한 것이라면, 존재자의 존재를 위협하는 그런 타자성을 주체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레비나스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을 '에로스'로 설명한다. 타자성은 여성성이다. 여성성은 신비의 순간이다.(여자들은 절대 동의 안 할테다) 절대로 파악되지 않는 신비하고 연약하고 수줍은 '감춤'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합일하며 신비로움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열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이를 '애무'와 '사랑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사랑의 순간 사랑하는 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대상이지만, 이는 결코 그가 내가 지배하고 통제하는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존재.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하지만 서로 애무하고 몸을 맞댐으로써 나타나는 신비로 현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 사랑의 경험은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쾌락'이란 말로 사랑을 정당화 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그 사람과 처음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그 관능적인 경험은 특정한 '목적'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절대적 '끌림' 속에서 사랑은 가능하고 그 경험은 그 '순간' 자체로 절대화된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설명되지도 치환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경험은 진정으로 우리를 '고독'에서 끄집어낸다. 우리는 복수적이고 함께있다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은 그렇게 에로스로 치환되어 신비의 순간으로 명멸한다.

 

하여, 레비나스의 책을 읽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은 이런 것이다. 혹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관용'이란 말을 함부로 지껄이면서, 타자를 자신에게 조금도 위협되지 않는 대상으로 박제하고 거세하면서 기뻐하는,  '주체'와 '관용의 정치성'에 중독된 편집증 환자는 아닌가? 니체가 말하듯이 도덕의 강요는 가치의 욕망을 숨긴 위선이며, 르상티망의 비뚤어진 발현일지도 모른다. 그런 타자성의 제거를 통해 우리는 에로스로 도달하는 진정한 '타자성'의 차원을 모두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강요되고 우리가 강요하는 '평준화 된' 도덕과 정치성이 혹시 '타자'와 '타자성'을 가차없이 짓밟는 폭력은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 블로그를 너무 버려두고(?) 있는 것 같아서 예전에 써 둔 글을 '그냥' 올려본다. 5년전쯤 쓴 글인데, 다시 읽어보니 예전엔 참 겁도없이 이런 이야기를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다시 읽고 쓴다면 다른 글이 될 것 같지만, 레비나스를 다시 읽을 것 같지 않다. 무리한 부분이 많지만 글을 고치지 못한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