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Papers

<<낭만주의의 뿌리>> 독자 교정 의견서.

빵가게제빵사 2021. 9. 20. 16:58

기회가 닿아 존경하는 벌린 선생님의 저작 <<낭만주의의 뿌리>>(석기용 옮김, 필로소픽, 2021)의 새 번역본 교정 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벌린 선생님의 번역문을 꼼꼼이 들여다보고 의견을 덧붙인 일은 차분하고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지금 읽을 필요보다 곧 절판될 것이기 때문에 구입한다는 어떤 분의 포스팅을 보고 한참 웃었는데, 솔직히 맞는 이야기다. 교정 의견서를 보낸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고, 포스트가 계기가 되어 웃으며 블로그에 옮겨 놓는다. (다만, 이 교정 내용은 첫 교정때의 원고라 현재 출간된 최종 판본의 텍스트와는 다르다. 원 번역문이 약간 이상해 보여도 역자 선생님이 여러 번 교정할 것을 전제해 '일단 번역해 놓은' 부분도 있으니, 포스트를 읽는 분은 역자 선생님이 번역을 엉망으로 했다고 생각해주지 않으시면 좋겠다. 교정을 반복하며 이루어진 번역 수정은 대부분 번역자 석기용 선생님이 몸소 문제점을 찾아 고치셨으며, 내가 아는 한, 석기용 선생님은 이론서 분야에서 탁월한 번역문을 구사하는 분이시다.)

 

1. 총평

매우 수려하게 읽히며 저자의 뜻과 의도 그리고 서술방식(또는 강연방식)을 명료하고도 생생히 살려낸 탁월한 번역본입니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 중 이 번역본에 경탄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기존 번역본과 비교해 비교 우위가 뚜렷하여 새 번역본을 낮춰 평가하는 경우는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새 번역본은 다양한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두루 갖추었으며, (대체로 영어권에 한정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벌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한 까닭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상의 효율적 요약, 명료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 풍부한 문예적 사례를 인용하는 특징으로 인해 이 책은 낭만주의를 다룬 진중한 연구서이자 훌륭한 인문 교양서로 자리매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 교정

가급적 책을 처음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려 했고, 교정은 1)문맥에 나타난 의미 흐름에서 볼 때 의미가 극히 불분명하거나 어색하게 읽히는 부분 2)평균적인 읽기 관습에서 접근했을 때 오해를 살 수 있거나 어색하게 읽히는 부분 3)오자나 잘못된 표기(대개 조사)를 이르집는 정도로 제한하여 작업했습니다.(물론 많지 않으며, 1),2)는 오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원문에 충실히 번역했기 때문에 오역처럼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집자와 역자 선생님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는 여러 부분 중 제가 언급 가능한 곳에 약간의 코멘트를 더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 쪽수는 보내주신 원고를 따랐습니다.

* 역자 선생님과 편집자님이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띄어쓰기가 이상하거나 반점과 구두점이 중복된 부분도 표시를 해 놓았는데, 초벌 번역을 수정할 때 일어나는 프로그램 문제로 보여 여기서는 생략했습니다. 필요하면 차후 요청해 주십시오.

 

존 그레이의 서문

1) 5. “(...) 낭만주의의 관점이 대단히 모순적이었다고 벌런이 생각한다는....” => 벌린

 

편집자 헨리 하디의 서문

2) 9. “(...) 모제스 호조그라는 유대인 학자가 뉴욕의 야간 대학에서 성인 대상 강좌를 맡아 지독히 애를 먹으면서 자신감 상실의 위기를 겪고 있는 장면에서 그가 맡은 강좌명이 바로 <낭만주의의 뿌리> 였기 때문이다.” => ‘가 두 번 들어가 어색하게 읽힙니다. 지독히 애를 먹으며 자신감 상실의 위기를 겪고 있는 장면에서가 어떨까 합니다.

 

3) 11. “A)그들이 드러낸 모든 낭만주의적인 특성 안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고, B)그들 모두가 드러낸 낭만주의적인 특성 안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며,” => 편의적으로 A), B)를 붙여 구분했습니다. 두 문장에 차이가 있기는 한데, 여러 번 곱씹어도 미세해 보입니다. 원문도 번역문과 같은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4) 13. 각주15. “오늘날의 표준에 따르자면 이런 관행 일처리 정확히 해두려는 의도 노골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경우와 (...)” => 목적격 조사 을/를이 세 번 반복되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관행에 따라 일처리를 정확히 해두려는 의도를정도의 의미로 보입니다.)

 

5) 13. 각주15. “비코의 <<새로운 과학>>” => 이 책은 <<새로운 학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원두 번역, 동문선. 1997/조한욱 번역, 아카넷. 2019) <<새로운 학문>>이 어떨까 합니다. (71쪽에도 <<새로운 학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혹시 비코의 다른 저술이 아닐까 하여 찾아보았으나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입니다.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장 정의를 찾아서

6) 22. “(...) 어떤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인간 의식의 거대한 격변에 책임이 있다. 우리 문제지를 손에 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이 있고 (...)” => 주격 조사가 빠진 것 같습니다. ‘우리 문제지를 손에 쥔 것이다.정도가 적절해 보입니다.

 

7) 24~25. “그 어떤 기독교도 기사도 무슬림과 맞서 싸울 때 그 이교도들이 불합리한 교리를 믿으면서 품고 있던 순수성과 진실성을 존경해야 한다는 일반 사람들의 기대가 있으리라 상상해봤을 리 없다. 용감히 싸운 적을 죽였을 때 우리가 품위 있는 인간으로서 적의 시신에 침을 뱉지는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란 없다. 그렇게도 많은 용기(이것은 보편적으로 존중받는 성질이다), 그렇게도 많은 재주, 그렇게도 많은 헌신을 그렇게도 명백히 부조리하거나 위험한 대의를 위해 소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딱하다는 입장을 택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사실 중요치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믿을 때 갖고 있던 마음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 믿음을 팔아넘기지 않은 고결한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우리 쪽으로 넘어왔더라면, 그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타산적이며, 매우 경멸할 만한 행태였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만일 내가 이것을 믿고 당신은 저것을 믿는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죽여야 하거나 혹은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게 아마도 옳은 일일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결투를 벌여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것이 최선일 테지요. 하지만 벌어질 수 있는 가능한 상황 중에서 최악은 타협입니다. 왜냐하면 타협은 우리 둘 다 각자가 가진 이상을 배반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 조금 까다로운데, 첫 번째의 우리가는 중의적입니다. 17세기 기독교도 기사들과 같은 생각을 공유한 그 시대의 사람들로서 우리를 뜻할 수도 있고, ‘품위있는 인간으로서 적의 시선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보편적 (그러니까, 강연장의 벌린과 청중을 포함한)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우리가와 세 번째의 사람들‘’를 발언하는 동일한 주체입니다. 첫 번째 주어는 다른 용어로, 두 번째, 세 번째 주어는 통일해 쓰는 게 바람직해 보입니다만 문장 구조상 어렵습니다. 제 생각엔 첫 번째 주어를 생략해서 쓰는 게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라는 주어를 생략하면 용감히 싸운 적의 시신에 침을 뱉지 않는 것이 품위있는 인간이라는 명제를 서술하는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본래의 중의성을 살리면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들은/사람들은/그 사람들은정도를 유연하게 사용하여 맞추는 게 어떨까 합니다.

 

8) 27. “하나의 이미지로서 19세기를 지배한 형상은 헝클어진 초라한 머리로 다락방에 앉아 있는 베토벤 인물 모습이다.” => 베토벤의 인물 모습이란 말이 어색해 보입니다. 베토벤의 초상이다정도 어떨까 합니다.

 

9) 32. “세기의 질병” => 이 부분은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이 맞는 것 같고, 위키백과에 따르면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당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환멸, 권태, 우울을 뜻합니다.(https://en.wikipedia.org/wiki/Mal_du_si%C3%A8cle) 세기의 질병에는 낭만주의가 유발한 환멸, 권태, 우울 등의 감정정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낭만주의는 병이다낭만주의는 환멸과 권태와 우울을 촉발시키는 무엇이다는 다른 의미니까요.

 

10) 32. “ 만질 수도” => ‘으로 만질 수도가 적절해 보입니다.

 

11) 33.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고상한 정부(情夫)들과 고귀한 심성의 죄수들만이 아니라 온갖 부랑자들과 뜨네기들이다.” => 맥락을 보면, 이 문장은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고상한 매춘부고귀한 심정의 죄수, 고상한 부랑자와 뜨네기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을 지시합니다. (‘사랑스런 창부와 비참한 처녀같은 표현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보면 고상한 정부는 의미가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고상한 매춘부가 본래의 아이러니를 잘 살려낼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를 분명하게 살려낸다면 창부가 더 어울리겠습니다만, 요즘 같은 시대에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 본래 서구 전통(?)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여자는 어느 정도 구분되었으며(결혼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자 어느정도 공적인 일이자 가문의 일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개인 사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여 중세에는 귀족들이 결혼했음에도 사랑하는 애인을 부부 사이에서 따로 두기도 했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종종 남자가 두는 정인(情人)은 고급 매춘부였습니다. 고대 희랍의 헤타이라부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코르티잔 그리고 근대 초까지 이어진 (같은 발음의) 코르티잔까지, 고급 매춘부는 보수만으로 상대를 함부로 정하지 않았고, 성적인 서비스만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법도 갖추었고, 문예적 교양도 풍부해서(고급 매춘부 중에는 시인도 있습니다.) 매춘부로 취급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남자가 애인으로 두는 코르티잔은 정인’, ‘정부정도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역자 선생님이 이런 것을 염두에 두셨다면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한국에는 그런 수준의 고급 매춘부나 기녀가 있던 전통이 없고 일반적인 독해로 보면 매춘부/창부 정도가 훨씬 적절해 보입니다.

 

2장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공격

12) 37, “(...) 노아의 홍수가 우리를 지금처럼 나약하고 죄 많은 존재로 만들기 이전의 어떤 황금시대 아마도 그 진리를 알았을 것이다.” => 입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한 의도된 번역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대에 이미 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어서 중복 표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황금시대에는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13) 40, “이번에도 일부 저명한 계몽주의 공론가(空論家)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다.” => 제 생각에는 공론가로 표기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벌린은 인물의 경향을 묘사할 때 이단 구성일 경우, ‘부정적 경향 이상적 경향의 형태로, 삼단 구성을 쓸 경우 부정적 중도/온건 이상적같은 형태를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도 진지하지 못한 계몽주의자 진지한 계몽주의자의 구분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공론가는 진지하지 못한 계몽주의 사상가(또는 진지한 사상가의 진지하지 못한 측면)를 암시하는 것 같아, 벌린의 의도를 살린 것 같습니다. 공론가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4) 50. “따라서 이 사상 안에는 영적인 삶에 대한 강조, 학식에 대한 경멸, 제례의식과 형식에 대한 경멸, 허례와 예법에 대한 경멸 (...)” => 문맥으로 보면 루터주의에 따라 경건주의자들이 학식, 제례와 형식, 허례와 예법에 대한 경멸을 보였다는 이야기인데, 두 번째 항목인 제례의식은 카톨릭 교회나 프랑스 왕실에 행할 법한 여러 의식들을 총칭하지 않나 합니다. 그렇게 보면 (죽은 이에게 행하는 의식을 뜻하는) ‘제례의식보다 전례또는 전례의식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의식을 행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어휘가 전례이고, 전례는 왕의 대관식 같은 공식 행사를 뜻하기도 합니다. 원어 확인 부탁합니다.

 

*모든 예법을 뜻하는 의미로 제례의식으로 쓸 수 있습니다만, 다음 단어가 허례와 예법이라서 중복됩니다.

 

15) 51. “내가 사는 지역의 국왕이나 제후가 내 땅을 징발한다. 난 원래 내 땅을 소유하고 싶지 않다. 제후가 나에게 높은 신분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원래 신분 따위는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이다. 국왕이 내 재산을 강탈해 간다. 재산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 아무리 자녀를 사랑해도 어차피 세속의 애착은 원래 신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 이런 식이다.” => 이 부분은 의역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만, 처음 읽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읽어보면 연관관계가 선뜻 들어오지 않아 낯섭니다. 약 두 번째 사례까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세 번째 사례를 읽으며, 이것이 사례이고 현상-반응의 관계이며, 라임이 반복된다고 느낍니다. 역자 선생님은 입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짧게 끊으신 것 같은데, 만약 원문이 현상과 반응의 관계가 드러나는 복문이라면, ‘그렇다면같은 어휘가 추가되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국왕이나 제후가 내 땅을 징발한다. 그렇다면 난 원래 내 땅을 소유하고 싶지 않다. 제후가 나에게 높은 신분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래 신분 따위는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이다. 국왕이 내 재산을 강탈해 간다. 그렇다면 재산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자녀를 사랑해도 어차피 세속의 애착은 원래 신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 이런 식이다.”

 

16) 51.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고도로 개인적이고 격하게 감정적인 다량의 문예, 지성의 혐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 => ‘지성의 혐오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다량의 문예라고 번역한 것 같지만 혹시 다양한 문예가 아닌지 질문합니다. 문예는 문학예술이란 추상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어서 수량을 나타내는 말과 직접 연결시키면 어색합니다. (다량의 문예작품이란 뜻으로 짐작되며, 의미가 통하지 않을 정도는 아닙니다.)

 

17) 55. “그런 명제는 아주 많은 것들의 공통점, 상이한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상이한 종류의 많은 것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다양한 시대의 공통점을 차별화하는 개념과 범주를 사용했다. 그런 명제는 일반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떨구어 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 맥락이나 저자가 강연하는 습관으로 보아, 1)‘그런 명제는 A)아주 많은 것들의 공통점 B)상이한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C)상이한 종류의 많은 것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D)다양한 시대의 공통점, A)B)C)D)를 차별화하는 개념과 범주를 사용했다란 의미를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나열된 종류가 많다보니 2)‘그런 명제는 A)B)C)의 공통점을 그리고 D)의 공통점만을 차별화하는 개념과 범주를 사용했다.’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1)의 의미가 맞다면,

 

그런 명제는 아주 많은 것들의 공통점, 상이한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상이한 종류의 많은 것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다양한 시대의 공통점, 이 모두를 차별화하는 개념과 범주를 사용했다. 그런 명제는 일반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떨구어 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18) 55. “(...) 이 흐름을 잘라 분할하려는 시도는 그 생명을 죽이는 짓거리라는 것이다.” => 이 외에도 반대쪽 사상이나 사상가를 경멸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미로 짓거리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는데, 비하의 의미가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정도로 수정 가능한지 질문합니다.

 

19) 55. “과학은 그 나름의 목적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아내고 싶을 때, 모종의 일반 원리나 물체 일반에 관한 일반 명제에 관해 알고 싶을 때(물리적 원리이건 화학적 원리이건 간에), 어떤 기후가 어떤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생장물이 자라도록 도와줄 것인지 알고 싶을 때 등등의 경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과학이 아주 적절했다(그럴 때에조차 과학이 항상 옳은 소리만 하는 것 아니다).” => 문맥이 긍정(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 보다 긍정(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적절했다) -> 역시 부정(그럴 때에조차 과학이 항상 옳은 소리만 하는 것 아니다)’ 형태입니다. ‘조차를 쓰면 이미 부정이 나온 상태에서 역시 또 한 번 부정하는 문장 형태라서 긍정이 두 번 반복된 위 두 문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음 문장이 그러나로 시작되는 부정문임을 고려하여 부정의 강도를 낮추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예컨대 다음의 문장입니다.

 

과학은 그 나름의 목적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아내고 싶을 때, 모종의 일반 원리나 물체 일반에 관한 일반 명제에 관해 알고 싶을 때(물리적 원리이건 화학적 원리이건 간에), 어떤 기후가 어떤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생장물이 자라도록 도와줄 것인지 알고 싶을 때 등등의 경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과학이 아주 적절했다 (그럴 때 과학이 항상 옳은 소리만 하는 것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아내고 하는 바에 대해서는 아니다. (...)”

 

3장 진정한 낭만주의의 시조들.

20) 66. “그러나 비록 루소와 여타 백과전서파가 적합한 방법이 무엇이냐에 관해 관점의 차이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 하고 싶었던 일 같았다.” => 조사 이 두 번 쓰여 어색합니다. “그들 하고 싶었던 일 같았다.” 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21) 67. “만약 우리가 1760년대와 1770년대 독일의 소위 질풍노도 운동이 만들어낸 3에도 못미치는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희곡들을 (...)” => ‘질이 떨어지는 수준의 희곡을 의미한다면 삼류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18쪽에서도 삼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22) 67. “사자가 양과 함께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강한 자들은 숨쉴 공간이 있어야 하며, 약한 자들 궁지로 몰아야 한다.” =>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분명하지 않아 약한 자들은 궁지로 몰아야 한다가 어색합니다. ‘약한 자들 궁지로 몰아야 한다약한 자들은 궁지로 몰려야 한다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23) 68. “인간적 노력에서 탁월성을 드러낸 모든 위대한 거장들은 (...)” => 노력을 기울여 본인의 탁월성을 드러냈다는 뜻인지, 노력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탁월성을 드러냈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나, 검토 부탁합니다.

 

24) 70. “(...) 그 덕분에 적당한 구전을 받게 될, 그래서 어쩌면 내 이름을 불멸의 예술가로 만들어줄지도 모를 (...)” => 사전에 나온 설명도 그렇고, 실제 사용된 용법에 따라도 구전(口錢)’은 흥정을 붙여주고 받는 돈 즉 중개인이 받는 수수료를 뜻합니다. 창작자나 제작자가 받는 대가로는 쓰지 않습니다. 지금 발언하는 인물은 음악가이자 창작자인데, 이런 인물이 자신이 받게 될 대가로 구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건 어색해보입니다(만약 가능하다면 화가도 아닌 음악가가 중개인을 통해 자기 작품을 팔아 구전으로 보수를 받는 복잡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원어가 특수한 어휘라면 적당한 어휘를 다른 책에서 찾아 대체하거나 또는 발음 그대로 표기하거나 무난하게 보수대가정도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25) 75. “만약 그리스인이 그리스인으로서 본인들에게 완벽한 이상을 갖고 있었다면, 만약 불행히도 로마인이었던(적어도 헤르더의 관점에서 명백히 로마인은 그리스인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그들 로마인이 비록 덜 완벽하지만 어쨌든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이상을 갖고 있었다면, 만약 초창기 중세가 이를테면 니벨룽의 노래(그가 대단히 찬양해 마지않은)나 다른 초기 서사시의 형식을 빌려 장엄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면(그는 이 서사시들을 여전히 숲속을 방황하고 있는 때묻지 않은 신선한 사람들의 간명하고도 영웅적인 표현들로 간주했는데, 이들은 그들 문화를 야만적인 방식으로 짓밟는 어떤 무시무시하고 질투심 강한 이웃들에게 분쇄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만약 이 모든 것들이 참이라면, 그래도 우리가 그것들 모두를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다.”

 

=> 문장을 짧게 줄이면, ‘그리스인의 이상, 로마인의 이상, 중세의 이상이 각기 다르고 통약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우리가 그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는 이야기인데, 부사 그래도가 어색합니다. ‘그래도가 들어가려면 이어진 문장 앞에 오는 내용이 그래도이후의 내용과 상반되거나, 예상되는 결과와 달라야 합니다. (‘나무가 쓰러졌지만, 그래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각 이상이 통약 불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결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가 쓰일 수 있다면, 이 문단 위 너무 멀지 않은 곳 어딘가에 우리는 통일된 이상을 소유하기를 원한다같은 이야기가 나와야 가능한데, 없습니다.) ‘그래도가 어색하게 읽혀 삭제하거나 다른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26) 76. “각각의 시대에는 그 나름의 내면적 이상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 => 내면적이라는 용어는 심리적 범위로 한정되는 느낌을 줍니다. 원문상 본래 그런 의미라면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고, 심리적 요인을 포함한 다른 것까지 포함한다면 내재적이나 내적 정도의 용어가 어떨까 합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 <<베르테르>>, <<니벨룽의 노래>>의 국역본 제목은 가지각색입니다. 통일되어 쓸 수 없다면 현 번역문 표기를 따라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작품인지 분명해서 대부분의 독자가 알아볼 것 같습니다.

 

4장 절제된 낭만주의자들

27) 78. “두 명은 철학자이고 한 명은 예술가(극작가)로서 세 명 모두 독일뿐 아니라 국경 바깥에까지 전체 낭만주의 운동에 매우 심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 ‘낭만주의 운동 전체에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28) 78. “그러나 18세기에는 이 말 명백히 해당 안 되는 특정 독일인들 있었다.” => 주격조사 가 두 번 쓰여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이 말 명백히 해당 안 되는 특정 독일인들이 있었다가 더 나아 보입니다.

 

29) 79.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원형적인 타고난 자유를 지닌다.” => ‘원형적인 타고난 자유가 어색하게 읽힙니다. 85쪽에 천부적인 선택의 자유라고 번역된 구절이 있는데, 이를 보아 원형적인 타고난 자유천부적인 자유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천부적으로 타고난 자유정도로 수정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30) 85. “그럴 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에 형상을 입힌다. 자연을 부수고, 자신의 인격성을 자연에 부과한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특정한 이상들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이상들에 전념함으로써 자연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다. 그리하여 자연은 이리도 되고 저리도 되는 조형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다. 자연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조형이 더 잘 되기도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모든 자연은 인간이 무슨 일을 할 때 도구가 되거나 대상이 되거나 장소가 되는 무언가로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며, 도리어 인간이 속하게 되는 그 무언가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인간이 온전히 다 자연에 속해 있는 존재일 수는 없다.”

 

=> 인용문을 확인하면, ‘자연이란 단어는 어떤 전체를 의미하는 유일무이한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모든 자연이란 용어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연으로 표기하면 어떨까 합니다. (‘자연의 어떤 부분이라고 앞부분에 밝혀 놓았기 때문에 전체를 의미하는 모든을 넣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31) 88. 리처드슨의 소설 <<클라리사>> =>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국역본으로는 <<클러리사 할로>>(김성균 역, 지만지. 2012)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32) 90. <<의사 지바고>> => <<닥터 지바고>>로 수정하신 것 같은데, 최종본에는 아직 <<의사 지바고>>로 출력됩니다. 참고하세요.

 

33) 98. “이렇게 해서 우리는 거창한 민족주의적 집단 충동 혹은 계급 고취적인 집단 충동이라고 하는 바로 그 개념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연유들을 얻게 된 것이다.” => 문맥으로 보면, ‘민족주의에 촉발되어 나타난 집단적 충동’, 그리고 계급 의식/계급적 동질성에 의해 촉발된 집단적 충동이란 뜻인데, ‘계급 고취적인 집단 충동집단 충동에 의해 계급(Class)이 고취된다’(계급을 고취시킨 집단 충동)라는 의미로도 읽혀,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역자 선생님이 운율을 맞추려고 조사를 삭제하신 것 같은데, 굳이 맞추어 수정한다면 이렇게 해서 우리는 거창한 민족주의에 고취된 집단 충동 혹은 계급에 고취된 집단 충동이라고 하는 바로 그 개념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연유들을 얻게 된 것이다.정도는 어떨까 합니다. 단 이렇게 해석한 제가 옳아야겠죠. 검토 부탁합니다.

 

* <<예브게니 오네긴>> , <<오블로모프>>, <<인간 혐오자>>, <<도적 떼>>(<<군도>>로 번역된 것도 있긴 합니다만)는 모두 국역본 제목과 동일합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번역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5장 고삐풀린 낭만주의

34) 99. “우리는 모종의 저항 같은 것이 있을 때나 자아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나 자신을 대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완강한 실재에 의해 강제된 그 무엇으로 의식하게 된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방해할 때, 무언가 듣고 있는데 모종의 방해물이 있을 때, 우리가 지금 이해해 보려고, 느껴보려고, 어쩌면 지배하거나 정복하거나 고쳐보거나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그것과는 다른, 어쨌든 무언가 조치를 취하든 아니면 그걸로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그 비()자아와는 다른 어떤 존재자로서 우리의 자아를 의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방해물이 미친 영향이다.”

 

=> 역자 선생님도 이 부분을 고심하셨던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만, 문맥으로 보면 길게 밑줄 친 문장은 자아는 어떤 저항/방해하는 실재에 의해 강제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무엇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완강한 실재인데, 위 아래 문장을 살펴보면 완강한 실재저항/방해하는 실재를 뜻한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완강한’(모질고 굳세다)이란 형용사가 어색하게 보입니다. 원문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만 저항하는 실재방해하는 실재 정도가 문맥상 맞지 않나 합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35) 100. “만약 자아가 더 이상 해당 개인과 동일시되지 않고 공동체나 교회나 국가나 계급 같은 어떤 초인격적 존재와 동일시된다면, 그런 자아는 전진 앞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거대한 의지가 될 것이고 (...)” => 차분히 설명하는 대목인데 중간에 있는 전진 앞으로는 구호이자, 외치는 입말처럼 보여 문맥의 톤과 어울리지 않고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줍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36) 104.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저항이나 대치의 순간에서만 나 자신을 제대로 느낀다는 것이다. 정복욕과 반항심이야말로 이런 순간이 하나의 이상에 이른 것이다. => ‘정복욕과 반항심의 순간이 하나의 이상에 이른 것이다가 아닐까 합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37) 104. “(이것은 오래된 르네상스의 신조로서, 더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영지주의에 그 원천이 있다.)” => 사상에 추가 설명을 더하지 않는 번역원칙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신비주의적 생기론에 많이 의존하는 5장의 내용으로 볼 때, 영지주의에 추가 설명이 더해지면 좋겠습니다. 영지주의가 지닌 전개하는 실체로서 우주’, ‘실체에서 천상계로 그리고 물질계로 이어지는 시간 흐름의 따른 전개과정은 5장을 이해할 때 요긴합니다. 가능한지 문의합니다.

 

38) 111. “그 시도를 멈춘다는 것은 표현의 중단을 의미하고 표현의 중단은 곧 삶 중단 의미하기 때문이다.” => ‘표현의 중단은 삶 중단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현의 중단은 삶 중단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정도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39) 117. “따라서 비록 1)인간의 사회생활의 상층부가 경제학자들, 심리학자들, 도덕주의자들, 작가들, 학생들, 사실을 다루는 온갖 종류의 학자와 관찰자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어도, 그 부분은 단지 대양 아래 방대한 영역이 잠겨 있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2)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영역이 지나치리만큼 무덤덤하게 당연시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온갖 종류의 감히 예상치 못한 귀결들을 빚어냄으로써 그것이 직접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편의상 1), 2)로 구분했습니다)

 

=> 1)‘인간의 사회생활의 상층부는 조사 를 두 번 사용하여 어색합니다. ‘인간 사회생활의 상층부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은 상층부라는 용어입니다. 인간 사회생활의 상층부를 읽으면 사회생활의 상층 부분, 즉 상류층의 사회생활이나 사회생활 중 공적인 부분(예컨대 정치나 상부구조 같은)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본래 의미는 전체에서 가시적/가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부를 뜻합니다. 제 생각엔 상층부를 상술하는 마지막 단어 일각과 바꿔 쓰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인간 사회생활의 일각이/인간의 사회 일각이/인간 사회 일각이라고 서술하면 사회생활 중 일부분을 뜻하게 되고, ‘상층부를 사용할 때의 오독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비록 인간 사회생활의 일각이/인간의 사회 일각이/인간 사회 일각 경제학자들, 심리학자들, 도덕주의자들, 작가들, 학생들, 사실을 다루는 온갖 종류의 학자와 관찰자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어도, 그 부분은 단지 대양 아래 방대한 영역이 잠겨 있는 거대한 빙산의 상층부일 뿐이었다.”

 

=> 2)문장을 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영역무덤덤하게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직접 복수에 나섰는 이야기인데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비가시적인 영역을 무덤덤하게 당연시즉 무덤덤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는데, 왜 비가시적인 영역이 복수를 할까요? ‘무덤덤하게 당연시사람들이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고려하지 않았기에정도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번역문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무시되었던/인정되지 않았던/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며정도가 적당한 표현인 것 같은데, 원문을 확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미 흐름상 무시당한 비가시적 영역이 복수를 감행했다정도가 되어야 맥락에 맞습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40) 120. “소설은 매우 깊은 충격을 주었고, 위대한 베를린의 설교자 슐라이어마허는 이 소설을 옹호했다. (...) 고결한 슐라이어마허는 하류 포르노 소설이었던 루신데가 성격상 완전히 영적인 작품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모든 육체적 묘사들은 우의적으로 서술된 것이며, 소설 속의 모든 것은 단지 더는 잘못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영적 자유를 노래한 위대한 설교이자 찬가라는 것이다. 말년에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입장을 철회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비판적 예리함보다는 그의 친절함과 충절과 너그러운 마음씨의 공이라 할 것이다.

 

=> 내용으로 보면 하류 포르노 소설이었던 <<루신데>>를 옹호한 슐라이어마허가 말년에 이 입장을 철회하려고 했고, 그건 그의 비판적 예리함보다 친절함과 충절과 너그러운 마음씨 덕분이 그러했다, 라는 서술입니다. 이 전개가 이해가 가시나요? ‘친절함과 충절과 너그러운 마음씨덕분에 <<루신데>>를 옹호한 기존 입장을 철회하려고 했다? 인과관계가 불투명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의 친절함과 충절과 너그러운 마음씨보다는 그의 비판적 예리함때문이었다고 하면, 시간이 지나 그의 비판적 예리함이 빛을 발했고 <<루신데>>가 하류 포르노 소설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 덕분에 그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려 했다. 이렇게 하면 부정확하게나마 이해될 것 같습니다.) 원문이 어떤지 검토 부탁합니다.

 

41) 121. “더할 나위 없이 품위 있는 시의원이자 장서 수집가가 등장하는 호프만의 이야기가 있다. 실내복 차림으로 방에 앉아 있고, 늘 그렇듯 오래된 원고들로 둘러싸인 채 있으며, 출입문 바깥쪽으로는 놋쇠로 만든 고리쇠가 달려 있다. 하지만 그 놋쇠 고리쇠는 이따금 소름끼치는 사과 행상으로 바뀐다. (...)” => ‘호프만의 이야기가 문제인데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작가와 구별되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이야기 속 주인공과 작가 호프만의 경계가 희미하다면 현 번역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두 번째 문장의 대신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라는 구절을 넣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가 이야기의 주인공인지 저자 호프만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 <<빌헬름 마이스터>><<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방랑시대), 그리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초고로 알려진)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가리키는지 명시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빌헬름 마이스터>>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합니다.

 

* <<파우스트>>, <<헤르만과 도로테아>>, <<친화력>>, <<채털리 부인의 사랑>> 은 국역본과 제목이 일치합니다.

 

* 슐레겔의 <<루신데>><<>>라는 제목으로 (이영기 역, 문학동네. 2020)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나머지 작품은 국역본이 없는 것 같습니다.

 

6장 영속적인 영향

42) 125. “첫 번째 명제와 연결되는 두 번째 명제는 이른바 사물들의 구조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몸소 적응해야 할 패턴 같은 것은 없다. 우주의 몰입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쨌든 우주의 끝없는 자기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 ‘우주의 몰입이 무엇을 뜻하는지 매우 불분명합니다. (우주가 몰입한다? 몰입한 우주?) 검토 부탁합니다.

 

43) 127.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인들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라는 상징들 (...) 그렇지만 설령 아폴로가 무엇을 뜻하고 디오니소스가 원한 게 무엇인지 자문한다 하더라도, ” => 희랍의 신인 ‘Apollon )Apollo’ 은 요즘 대부분 아폴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염두에 둔 구절 같은데, 이 책의 번역본들 대부분도 아폴론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44) 127. “모든 예술은 삶이라고 하는 쉼 없는 활동을 바라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선을 상징을 통해 환기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 이 문장은 몇 번씩 반복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와 닿지 않습니다. 1)모든 예술은 삶이라고 하는 쉼 없는 활동이다. 2)그 쉼 없는 활동을 바라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선(?)을 상징을 통해 환기하고 하는 시도이다. 어디서 어떻게 끊어야 할지, ‘바라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짐작되지 않습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45) 130. “그런 것들 사이에서 민족의의 구성원들이” => 수정과정에서 일어난 오류처럼 보이지만 가 두 번 쓰여 출력됩니다. 참고하세요.

 

46) 143. “라이덴의 얀John of leiden” , “토르케마다Torquemada” => 상당히 낯선 인물들이라 설명이 추가되면 좋겠습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47) 147. “이것 파시즘 그야말로 핵심이다.” => 조사 가 두 번 들어가서 어색합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 그야말로 파시즘 핵심이다가 어떨까 합니다.

 

*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 더 언급 안하겠습니다.

 

참고문헌

48) 160. “인류의 지당한 연구The Proper Study of Mankind가 다소 질이 떨어지는 벌린논고들의 상태를 공개한 한 가지 방식이 바로 헨리 하디가 최선을 다해 그 논고들에다 완전한 각주라고 하는 복장을 입힌 것이다.” => 1) 벌린의 논고를 공개하는 질이 떨어지는 방식이 있다. 2) 그것은 편집자 헨리 하디가 최선을 다해 벌린의 논고에 완전한 각주를 단 것이다. 3) <<인류의 지당한 연구>>가 거기에 해당한다. 여러 번 읽으면 대략 이런 의미로 읽히는데, 지나친 영어식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한국어 문장 형태로 수정되면 좋겠습니다.

 

49) 161. “스테판 콜리니가 일반 문헌에 참고문헌을 각주로 달아놓는 것 글의 색깔을 변경하는 일이라고 한 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 ‘스테판 콜리니가 일반 문헌에 참고문헌을 각주로 달아놓는 것을 두고 글의 색깔을 변경하는 일이라고 한 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정도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50) 161. “대본 없이 수행한 강연 녹취 원고의 경우에 참고문헌을 해당 쪽의 각주로 달아 놓는 것이 어쩌면 특히 더 불편한 분위기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 => ‘불편한 분위기를 야기할 수도정도의 의미입니다. 적절한 어휘로 수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기존 번역본과 새 번역본의 차이와 장점

기존 번역본도 나쁘지 않은 번역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이라고 느껴질만큼) 지나치게 긴 복문을 사용함으로써, 1)의미가 불분명해지고 모호한 지점들이 많았으며, 2)벌린이 오밀조밀한 표현을 통해 암시하려 한 세부사항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3)전혀 강연문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4)벌린의 서술/강연 스타일이나 특징이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기존 번역본은 강연문의 형태는 살리지 못한 채 원문에 맞춰 번역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에 비해 새 번역본은 가급적 짧게 끊은 번역문과 번역자가 섬세하게 선택한 운율감 있는 어휘와 문장 구성으로 인해 1)(강연을 활자화하며 수정한 중간적인 형태에 맞춰) 입말의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으며, 2)강연을 직접 듣고 있는 느낌을 주고 3)저자의 설명방식이 분명해져 저자가 암시하고 싶었던 부분들도 살아나며 4)기존 번역본에서 모호했던 핵심 및 세부사항이 훨씬 명료하게 이해됩니다. 아울러 6)기존 번역본의 누락된 사항과 오역들이 복원·수정되었고 7)헨리 하디의 편집자 서문에서 공개된 미공개 메모들과 존 그레이의 서문은 흥미를 더해주며 8)부록으로 수록된 편지글은 벌린의 재치와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편지글까지 읽은 독자들은 벌린에게 호감을 가질 것입니다.) 제 생각엔 기존 번역본보다 새 번역본이 장점이 많고 세부적 사항들을 면밀하게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낭만주의의 뿌리>> 구 판본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도 장점이 공지되면 구입할 것 같습니다. 

 

4. <<낭만주의의 뿌리>>의 매력

1) <<낭만주의의 뿌리>>는 원칙적으로 사상사 서적에 해당합니다. 서구 합리주의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이를 수정하여 근대화시킨 계몽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 사상의 발흥과 변환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하여 서술합니다. 그러나 개념을 제시하고 딱딱하게 서술해가는 코젤렉(<<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작업(<<키워드>>), 지나치게 학술적인 켄틴 스키너의 저서(<<근대 정치사상의 토대>>)와 달리 부드러운 교양서로서의 성격이 강해, 사상사/지성사/개념사에 관심있는 전문가층과 일반 교양층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장점과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2) <<낭만주의의 뿌리>>는 사상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근대세계의 풍경을 그리는 문화사 책처럼 읽힙니다. 새로운 사상이 17세기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게 했는지, 그에 대한 계승과 전환이 어떤 과정을 거쳐 18세기부터 현재까지 표현되었는지를 철학, 문학, 미술, 음악의 영역을 가로질러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경이롭고, 우스꽝스러우며, 서늘하게 만드는 한 점 소장하고 싶은 풍경화처럼 다가옵니다. 이러한 생생함과 풍부함 그리고 다채로움은 딱딱한 지성사 저작들이 보여줄 수 없는 경지이며, 본인의 글쓰기를 문학이라고 부른 벌린의 너른 폭과 지평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전문가를 포함한) 교양층 독자 중 <<낭만주의의 뿌리>>의 이러한 매력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3) <<낭만주의의 뿌리>>를 읽는 독자는 한 가지를 지속적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바로 사상 뒤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는 사상의 원동력을 사회학적 요소보다 인간 본성에 두는 벌린 저작의 특징입니다. 벌린이 그리는 인간은 영혼과 신체가 결합한 성격의 복합체이며, 질서있는 세계와 삶을 꿈꾸는 동시에 무질서한 해방을 동경하며 파괴하고 부정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간의 복잡다기한 기질을 응시하도록 만듭니다. 벌린에게 사상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다양한 인간 기질의 한 측면을 도려내고 논리적으로 다듬어 세계관으로 탄생시키는, ‘해방을 약속하지만 종국에는 압제로 변질되는사고와 상상력의 부산물입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정합적인 사상과 가치와 신념을 받아들여 일관된 삶을 영위하려 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가치, 욕망, 기질의 충돌을 경험하며, 이를 통일시키기 위해 하나의 사상적 극단으로 치달을 때 자기 파멸적 비극을 겪을 수 밖에 없음을 넌지시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끄덕이며, 누군가는 물음표를 그리며 책을 덮을 것이지만, 인간의 본성과 기질과 욕망이 빚어내는 무정형한 삶의 실존성을 들여다보는 계기는 인문학 독서가 줄 수 있는 값진 경험 중 하나입니다. (출판장르) 인문학 서적에 넘쳐나는 저렴한 인간학이나 심리학 서적이 주는 근시안적 해결책과 달리, 사상사의 풍경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 <<낭만주의의 뿌리>>는 품격있는 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문 교양서 독자들은 매료되리라 생각합니다.

 

5. 저자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소개는 대개 자유주의 사상가인데, 이 때문에 국내 학자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층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특히 저명한 <자유의 두 개념>에서 소극적 자유만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라는 악명높은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벌린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주장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거로 자주 활용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척이라도)해야 진보적 지식인/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당대는 전제정이라고 평할 공산주의 국가들이 건실하던 냉전기이고 벌린은 냉전 시대에서 구분을 명확하기 하기 위해 소극적 자유를 주장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냉전이 끝났고, 표면적이지만 민주주의가 정치체의 표준이 된 현재, 벌린은 자유주의 사상가보다는(물론 틀린말은 아닙니다만) ‘근대서구의 다양한 사상적 변화를 탐구한 사상사가정도로 소개되고 자리매김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본래 직함은 철학자, 사상사가, 문예비평가(?)이지만, 철학자로서의 이력은 1940년 캠브리지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만나 벌인 발표회 후 그 스스로 걷어찼고, 문학 작품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상사적 문예비평도 여럿 작성했지만 자신을 문예비평가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의 수사를 붙인 사상사가, 사상을 다룬 저술가 정도의 저자소개가 어떨까 합니다.

 

6. <<낭만주의의 뿌리>> 독자층

이 책은 1) 18세기 독일 관념론을 공부하는 학생, 2) 지성사/사상사에 관심있는 독자, 3) 예술철학 또는 미학 관심 독자 4) 인문 교양서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1) 18세기 독일 관념론을 공부하는 학생

칸트부터 시작해 헤르더, 피히테, 셸링, 헤겔을 경유해 쇼펜하우어와 (그리고 넓게) 니체까지 이르는 독일관념론의 계보에서 인간이 주조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 표현, 의지, 세계의 자기전개 등의 개념은 기존 계몽주의 철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개념이라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낭만주의의 뿌리>>는 그러한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고 수용되고 유통되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과 사상의 영역은 다르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며 참고서로 지정될만합니다.

 

2) 지성사/사상사에 관심있는 독자

다소 낡긴 하였습니다만, 지성사가/사상사가로서의 벌린의 명성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학적 엄밀성보다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해가는 방식에 비판이 있긴 하지만, 지성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반드시 호기심을 보일 책입니다. 더구나 사상이 사상가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닌 사상이 유통되는 환경과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본성에 의해 와전되며 종국에는 본래 약속했던 해방이 억압과 압제로 변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에 논쟁적이기도 합니다.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아도 지성사 독자들은 반드시 구입할 책입니다.

 

3) 예술철학 또는 미학 관심 독자

미학이 18세기 낭만주의에 경도된 독일인들에 의해 성립(?)된 것을 고려하면, <<낭만주의의 뿌리>>는 근대 예술철학과 미학을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사유의 핵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미학 관련 서적을 읽어갈 때 유익한데, 인간을 표현하는 주체로 정의하고 세계를 완벽한 표현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지정하며 점근적인 상징의 반복을 강요하는 등의 (현대인들에게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근대 미학의 근본 가정들을 명료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이해를 돕습니다. 근대 미학을 이해하는데 <<낭만주의의 뿌리>>는 매우 유익하며, 예술 종사자나 예술에 관심있는 독자들도 펼쳐보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책입니다.

 

4) 인문 교양서 독자

<<낭만주의의 뿌리>>의 매력 2)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사상사적 저작이기도 하지만 문화사로 읽힐만큼 다채로운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근대 문화에 관심있는 독자라면(대개의 인문교양서 독자들은 이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만큼 풍요롭습니다. 입소문을 탄다면 굳이 읽지 않더라도 한 권씩 구비해 놓을만한 책입니다. 그 외에, 이 책이 일반 교양 독자들에게 어필할만한 요소는 우리시대의 지배적인 자기 진정성자기 개발이데올로기의 기원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1)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인 내적 진정성을 지닌 존재이며, 자기 지복은 자기 진정성을 실현(자기 실현)하므로써만 가능하고 2)자기 실현을 위한 역량을 개발하여 결과물로서 자신을 실현/표현하면 3)자기 지복에 이르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자기 진정성/자기 개발 이데올로기에서 발견되는 다원적 가치관, 자기 개발의 신념, 그리고 삶의 미학화는 낭만주의로부터 직접 전승된 믿음입니다. 벌린이 밝혔듯, 우리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두 세계의 아이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가치와 신념의 기원을 추적하는 <<낭만주의의 뿌리>>는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개의 교양서 독자들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으며, 충분히 어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끝>

 

*** 10년 전에 구입한 고급스럽지만 낡은 외투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사야 벌린 선생님의 글을 지금도 좋아하고 아직도 그의 평전을 펼치면 즐겁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내 인생의 10권의 책'에 분명히 뿌리내린 책이며 벌린과 그의 저작에 작은 찬사를 담아 위의 교정지에 다음의 평을 적었다. 이 철지난 책을 읽는 이들은 소수겠지만, 눈 밝은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책을 통해 벌린을 발견하고 그의 글을 애독하게 된다면 기쁘겠다.

"<<낭만주의의 뿌리>>를 읽는 독자는 한 가지를 지속적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바로 사상 뒤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는 사상의 원동력을 사회학적 요소보다 인간 본성에 두는 벌린 저작의 특징입니다. 벌린이 그리는 인간은 영혼과 신체가 결합한 성격의 복합체이며, 질서있는 세계와 삶을 꿈꾸는 동시에 무질서한 해방을 동경하며 파괴하고 부정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간의 복잡다기한 기질을 응시하도록 만듭니다. 벌린에게 사상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다양한 인간 기질의 한 측면을 도려내고 논리적으로 다듬어 세계관으로 탄생시키는, ‘해방을 약속하지만 종국에는 압제로 변질되는’ 사고와 상상력의 부산물입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정합적인 사상과 가치와 신념을 받아들여 일관된 삶을 영위하려 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가치, 욕망, 기질의 충돌을 경험하며, 이를 통일시키기 위해 하나의 사상적 극단으로 치달을 때 자기 파멸적 비극을 겪을 수 밖에 없음을 넌지시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끄덕이며, 누군가는 물음표를 그리며 책을 덮을 것이지만, 인간의 본성과 기질과 욕망이 빚어내는 무정형한 삶의 실존성을 들여다보는 계기는 인문학 독서가 줄 수 있는 값진 경험 중 하나입니다. (출판장르) 인문학 서적에 넘쳐나는 저렴한 인간학이나 심리학 서적이 주는 근시안적 해결책과 달리, 사상사의 풍경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 <<낭만주의의 뿌리>>는 품격있는 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