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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s

잡담, <<대지의 노모스>>

빵가게제빵사 2018. 3. 18. 00:02

- 어제 동네를 걷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좌판을 펼치고 헌 책을 팔고 있는 걸 발견했다. 2000년대 초반 책들은 물론이고, 90년대, 80년대, 70년대 책들까지 (심지어 세로쓰기 책이 있더라...) 볼 수 있었다. 의외로 소설은 없고, 전부 인문사회서여서 신기한 느낌으로 책을 구경했는데, 슈미트의 <<독재론>>과 <<대지의 노모스>>를 발견했다. 책을 들어 인쇄 연도를 살펴보니 95년쯤이다. 그러니까 30년이 더 된 것이다. 놀라운 기분으로 책을 열어보니, 원 책 주인이 책을 읽으며 꼼꼼히 줄을 쳐 놓았고, 책장 여백에는 가끔씩 메모가 적혀 있었다. 법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한자를 사용한 것을 보아, 어떤 법대생이 아끼며 공부하던 책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혹시나 책 주인이 이 할아버지가 아닌가 해 슬쩍 쳐다보았으나, 여행용 의자를 깔고 앉아 무심하게 거리와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그 책 주인이 나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든 어쩌든, 나는 아무 관심도 없다오. 같은 표정이었다.


- 내가 슈미트를 알게 된 것은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읽으면서였다. 2008,9년 쯤이 아닌가 싶다. 슈미트에 대해서는, 나치 치하에서 대학교수를 했다는 정도, 무페가 전적으로 기댈만큼 뛰어난 이론을 개진했다는 정도, 좌파(?) 진영에서 진지하게 참조한다는 정도가 내가 알게 된 전부였다. 그가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며 법학에서는 고전적인 저작을 쓴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 후이고 , 황제 법학자라고 불리며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보다 더 지난 후다.


- 슈미트의 책은 네 권을 가지고 있는데(<<정치적인 것의 개념>>, <<정치신학>>,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땅과 바다>>) 찬찬히 읽어본 건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땅과 바다>> 정도다. <<정치 신학>>은 읽기는 했지만, 거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고,(에혀!) <<현대 의회주의....>>는 시간이 날 때 읽어봐야지하며 아껴두었다가 그만,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어디 그런 책이 한 둘이야?) 슈미트에 대해 거의 모르기 때문에 그의 책을 읽으며 받았던 인상을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일단 읽어보면, 고전적 저작을 쓸 수 있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단순 비교만 해보아도 그렇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나는 슈미트와 벌린을 비교해보고 싶은데, 기계적으로 일부를 인용해본다. 


"아무리 자신에게 엄격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느끼는 이일지라도, 사상사 연구자라면 자신의 자료들을 모종의 정형화 된 시각에 입각하여 지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에 법칙 및 형이상학적 교조, 즉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의 질서와 속성을 어떤 단일한 틀로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시대에 점점 더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신조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정치사상>,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p159~160


어떤가. 좀 장황하지 않은가. 세부를 놓치지 않으며 전체를 추상화를 해 내는 능력이 탁월한 저자의 덕목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형이상학적 결정론과 거리를 두는 체계를 언급하려는 세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벌린의 글은 어딘가 장황하다. 그에 비해 슈미트의 스타일은 이렇다.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오늘의 용어법에 따르면 국가는 어떤 지역적 경계 안에 있는 조직된 인민(Volk)의 정치적 상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국가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국가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아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문제로 삼는 경우에는 그러한 개념 규정은 필요하지 않다." - <<정치적인 것의 개념>>, p31.


한마디로 말하면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 자잘한 것을 사상해내고 핵심만 도려내는 글쓰기다. 특히 "국가는 어떤 지역적 경계안에 있는 조직된 인민의 정치적 상태"라는 규정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의 요약이다. 국가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국가라는 제약을 두면서 활동하는 인민의 공적 상태를 가리킬 수 밖에 없다. 공적 상태는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적 틀과 실천을 포괄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내고 있다. 아울러 국가와 정치를 한 문장 안에서 취급함으로써 국가의 입장에서 정치를 사고하고, 정치를 사고하면서도 국가를 염두에 두겠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국가보다 정치가 우선이라는 입각점을 놓치지 않는다. 탁월한 솜씨(?)다. 세부를 자잘하게 논하지 않으면서도 명쾌하게 핵심을 드러내고 제반사항을 압축해 표현한다. 고전적 저작을 쓸만한 천재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고 할까. 슈미트에 많은 사상가들을 매료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슈미트의 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읽어보면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다시 읽고 싶은 기분은 별로 들지 않는다. 우선적으로는 기민하고 깊은 글쓰기 속에 담겨있는 함의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가시적인 것을 되짚어 보면, 그가 그리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딘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잘 알려져 있다. 적과 동지를 나누는 구분에서 정치적인 것의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통찰은 매우 귀중한 것이지만(실제로 누누히 확인 가능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공적인 적을 발견하고 적의로 똘똘 뭉쳐져 있는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음험한 느낌의 공동체다. 더 큰 폭력과 학살을 제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공적 적의가 필요하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좋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수렴되는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인상비평이며, 이런 평가가 그의 이론에 대한 적절한 평이 될 수 없다. 사상이 인간과 공동체의 어두운 모습에 주목했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어선 안되며(만약 그러하다면 홉스는 물론 플라톤마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론이 던져주는 함의가 적지 않다는 점은 무페나 아감벤 또는 김항 선생의 최근 작업(<<종말론 연구소>>. 무척 즐겁게 읽었다.)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 하여, 나는 슈미트의 책을 업어올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아니다'다. 글을 읽은 분들은 나의 선호가 작용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그 책이,보기 드물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구할 수 없는 그 책이, 원 주인의 세심한 필기가 담겨있는 소중한 책이, 불행히도 한자한글공용표기였다는데 가장 큰 난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漢子를 細心하게 한글과 섞어 쓴 책이었기 때문에, 업어올 수가 없었다. 네이버 옥편을 뒤적거리며 읽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암담해서 들썩들썩 하다가 그만 놓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책을 사면 껴 줄테니 그냥 가져가라는 노인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냥 놓고 왔다. 누군가 눈밝은 수집가라면 탐낼만한 책이니 말이다. 곱게 놓아두고 그냥 왔다.


-오늘 다시 한 번 가볼까, 혹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밖을 나서려는데, 이런. 비가 온다. 노인장이 다시 왔을리가 없다. <<대지의 노모스>>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그냥 왔는데, 대지의 노모스만이라도 업어 올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에 잡담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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