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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는 열정>> 읽기 모임이 끝났다. 짧은 후기.

읽기 모임은 일주일에 한번씩 2시간 정도 진행했다. 참가자는 총 12명으로 시작, 최종 참가자 8명으로 마무리. 우려했던 것보다 이탈자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대부분 성실하게 참가해 주셨으며, 매 시간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의문스러웠던 점들을 해소할 수 있었고, 깊은 독해 끝에 나온 이채로운 해석에 감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매 시간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총평하자면, 독서모임은 모두에게 유익했다.

<<분별없는 열정>>의 최종 견적은 다음과 같다. 저자 마크릴라는 6명의 지식인 약전을 통해 1) 반론과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일자적 진리를 정치 영역에 도입하여 정치사회에 대한 고려없이 무조건 뜯어고치려는 시도와 2)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거에 모든 것을 뒤집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것을 시도하는 지식인의 행동이 3)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진리를 창출해 효용을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충만감과 명성을 얻으려는 지식인의 자기충족에의 열망(에로스/정신의 전제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여, 어떤 지식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이론을 내 놓은 뒤, 신문과 TV에 끊임없이 얼굴을 내밀고, 청강자 100~1000명이 앉아있는 강연장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지식인이 '분별없는 열정'(정신의 전제성)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다. 마크릴라는 이런 지식인들이 전제정을 지지할 가장 위험한 유형이라고 주장한다.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주장이다.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위해 6명의 지식인을 비판하는 수준이 너무 지나치다. 다시말해 6명의 지식인 약전에서 전개한 마크릴라의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 인신공격에 가깝다. 한편, 어떤 지식인이 유명세를 누린다고 해서 무조건 '전제정의 유혹' 시달린다는 마크릴라의 주장은 객관성이 있을까? 이는 지식인을 주관적 인상에 기반하여 비난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다시말해, 본래 주장은 충분히 수용할만하나, 그런 결론을 도출해내는 비판이 필요이상으로 신랄하고, 욕망을 기반으로 당사자를 판단하는 건 다소 위험하다. 그 정도가 우리가 낸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없는 열정>>이 읽기 모임을 활기차게 만들어준 것은 빼놓을 수 없다. 인물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저자의 평이 덧붙여진 세 가지 층위 덕분에 독서모임이 활기찼으며, 다양하게 토론할 수 있었고, 모임이 끝난 후에도 생각할거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지나치게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난이도에 깊이있는 서술 덕분에 독서와 토론 모두 알찬 시간으로 채워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모로 뛰어난 책이라는 생각이다. 

읽기 모임은 이렇게 끝났고,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발표문을 덧붙인다. 각각의 장에서는 마크 릴라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식인의 역할,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 모델을 밝히는 마지막 부분은 모두가 동의했다.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정치와 관계를 맺은 이들, 또는 정치라는 '악마적인 힘'와 싸우려고 결심한 분들이라면 음미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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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시라쿠사의 유혹


마크릴라는 여섯 편의 지식인 약전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에필로그에서 밝힌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진중한(답답하기도 한) 견해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읽어보자.

마크릴라는 전제정을 옹호한 20세기 지식인들을 이해하려는 역사가를 등장시킨다. 그 역사가는 지식인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양성한 근대 지식의 특성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하여 그는 사상사를 탐구한다. 거기에서 이사야 벌린을 만난다. 이사야 벌린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계몽주의에 기반한 근대 사상 자체가 전제적이라고. 계몽주의는 1)모든 현상 이면에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답이 존재하며, 2)각각의 답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데 3)모든 답을 모순 없이 연결하여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일자적 원리가 이성을 통해 드러나리라,고 가정한다고. 이것이 근대 지식이 갖는 전제적 특성이며, 이를 내면화한 지식인은 전제정을 옹호하는 성향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럴 듯한 분석이다. 하지만 역사가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바로 야곱 탈몬의 이야기로, 탈몬은 근대 지식이란 외향만 이성적일 뿐 반이성적이자 반합리주의로 점철된 종교적 열정과 메시아주의로 가득찬 것이라고 한다.(이성을 통해 인간이 진보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념은 ‘환상’이거나 ‘믿음’이지, 이성적으로 검증된 합리적 결론이 아니다.) 탈몬의 분석 역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 결과 역사가는 길을 잃는다.

하지만, 역사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방향을 돌려 지식인의 사회사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사르트르가 설득력 있는 서사를 들려준다. 세상에는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권력의 탄압에 맞서 인간성과 자유, 정의를 지키려는 도덕적이자 실천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적극적 참여를 통해 전제정에 맞서 왔다고. 그들이 바로 ‘지식인’이며, 전제정을 옹호한 20세기 지식인들은 '지식인'들의 정신과 참여에의 열망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그럴 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도 반전이 일어난다. 사르트르와 정확히 반대되는 대척점에서 레몽 아롱은 (사르트르의 감동적인 서사와 달리) 지식인들의 정신이나 사회참여란 별 것 아니었으며, ‘중대한 정치 사안들이 닥치면 한 계급으로서 지식인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바보 같아지는지’(p233)를 이야기해 준다. 한 술 더 떠, 아롱은 지식인은 자신의 특권적인 위치를 강조하기 보다는 시민이자 겸손한 의견제출자로 남아 있는게 더 현명하리라는 충고까지 한다. 그 결과 우리의 역사가는 다시 길을 잃는다.

마크릴라는 우리의 역사가에게 다른 제안을 한다. 역사가를 설득하기 위해 마크릴라는 플라톤을 재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된 완벽한 상태를 열망하고 꿈꾸는데, 이것이 ‘에로스’다. 에로스에 사로잡혀 완벽한 상태로 이행했다고 느끼고 만끽할 때 인간은 자신이 지복에 이르렀다는 충만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의 전제정’이다. 자신은 완벽하며 무결점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충만감은 어떤 반론과 회의도 허용하지 않고 그것을 공격하여 압살하는 ‘정신의 전제성’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신의 전제성에 굴복한 사람이 별볼일 없는 범죄자라면, 그는 세상에 작은 해악만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지식인’이라면 그 폐해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크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진리를 통해 충족감(정신의 전제성)을 만끽하려 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자신이 발견한 완벽한 내적 논리를 통해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체계적이자 전체적 지식, 즉 진리를 구축하며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움직인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에로스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그 사람들이 지식인의 진리를 이용하여 정신의 전제성을 실현할 때, 지식인은 자신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사회를 바꾸고 정치를 뒤집으며 새로운 계시로 강림하는 현상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기 이론이 나타내는 효용과 나날이 높아져가는 명성에 탐닉하면서 전제자의 저열한 옹호자로 변하기 때문이다.

한 인물이 완전무결한 진리를 발견/발명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겉보기에는 탁월한, 특히 반론과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자로서의 지식과 사상이란 지식인의 에로스를 충족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특히 무한한 요인이 교차하며 복잡다단하게 변해가는 실제의 삶, 즉 정치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지식인이 추구할 것은 정신의 전제성에 굴복하여 의사진리를 발명하고, 그에 맞춰 사회를 뜯어고친 후, 그에 따른 명성을 누릴 열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전제적 열망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것을 통제하고 ‘절제’하려는 열망을 품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사회를 자신의 뜻에 맞게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바로잡을 수는 있다.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사상을 다루는 지식인은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이며, 플라톤이 지칭한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하여 마크릴라가 내놓는 마지막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역사가가 지식인의 배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할 곳이 있다. - 바로 지식인의 내면이다.” (p247)

그러나, 이런 답변은 일견 답답하다. 지식인은 자신의 진리로 사회에 공헌할 기회를 ‘절제’라는 한마디로 날려버려야 하는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텍스트와 연구활동에만 매달리다 자신의 진리를 논문에 남겨두고 은퇴하는 것만이 훌륭한 지식인 모델인가? 번역자 서유경 선생도 같은 의문을 가졌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마크릴라는 정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지식인 모델을 다음의 예로 정리하여 답한다.

“(...) 시라쿠사에서 보여준 플라톤과 디온의 행동은 이것과 동일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정치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않으면서, 즉 정치를 비철학자에게 남겨 두면서 두 사람은 아무도 철인왕들의 도시를 건설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제 군주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고, 신중한 행위를 통해 전제자를 물러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디온의 경우 때때로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전부에게 주어진 모델이 아니겠습니까?” (p263. 강조 인용자)


모임에 참여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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