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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빡빡한 책은 안 읽는다. 땡기는(?) 책이 있어도 피한다. 2012년, 도 닦는 기분으로 빡빡한 책을 땀 뻘뻘 흘리며 읽었다가 더위를 먹어본 뒤 미련한 짓 안하겠다고 결심한 탓이다. (그렇게 읽은 책이 피와 살이 되었다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별볼일 없는 책이었다.) 물론 새 책이 나오면 산다. 하지만 읽지는 않는다. 선선해지면 꺼내볼 뿐이다.


그러니 매년 여름은 쉽고 간결한 장르소설을 읽는다. 물론 일주일에 한 권 정도다. 계보도 모르고 좋아하는 작가도 없기 때문에 그때그때 인기있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올해는 볼만한 책이 없었다. 펼쳐보았던 두 세 권의 책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 때문에 다른 책으로 우회하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일본 저자들의 에세이다. 그나마 아기자기하고 가와이한 책이라면 좋았을텐데, 땀냄새 진동하는 아자씨들의 에세이집이다. 우선은 기타노 다케시 다음으로는 오시이 마모루. 둘 다 정치적으로는 구제못할 보수주의자에 대책없는 마초들이다. 이런 책은 뜻을 세우고, 의지를 관철하며, 성장을 실천해가는 사람들에게는 핵폐기물이나 다름없다. 내용도 형편없다. 별볼일 없는 개똥철학이나 너무 지극타당한 이야기라 잔소리나 다름 없는 진리값을 가진 이야기로만 가득차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책은 세상에 진리따위란 없으며, 인간은 동물이고, 나이먹으면 주책바가지가 된다고 믿는 퇴물 아자씨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퇴물 아자씨들은 이런 책을 읽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술 마시며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는 (더 퇴물인) 아자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포장마차에서 횡설수설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 이야기 잘 들었소. 거, 입담이 좋군. 이번 술은 내가 사지 하는 기분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할까. 딱 그정도의 책이다. 만원이 조금 넘는 책값도 소주 한잔 샀다고 가정하면 그리 비싸지 않다. 게다가 가만히 새겨보면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기도 하다.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그러니까, 잘 모르는 누군가와 술 한잔 걸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중년 아자씨라면, 한 권 사서 볼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이번 여름에 중독되어 순차대로 읽어가는 건 곤란하겠지만. 여러 권 읽어본 결과, 기타노 다케시의 책은 재미있지만 돈 있는 중년의 횡설수설이고, 오시이 마모루의 책은 얼핏 보기엔 근엄한데, 술 마시면 허당이 되는 중년의 횡설수설이다. 별 볼일 없는 책이지만 여름에 읽기엔 딱이다. 땀내나는 중년 아자씨들이란 결국 땀내나는 중년 아자씨들이랑 놀아야 하는 것이다.


PS : 기왕 에세이를 읽는 김에 한국아자씨들의 에세이도 몇 권 넘겨보았는데, 한국 중년 아자씨들의 글은 너무 현학적이고 묵직하고 무겁다. 술 한잔 먹으면서 할 만한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책은 한 권도 없다. 한국에서 책이란 진리를 다루어야 하고, 최소한 석학 수준의 통찰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무의식 때문일까. 아무려나 너무 무겁고, 무게를 잡고, 전공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중년 남자들은 마흔만 넘어도 지천명을 깨달아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는 걸 여지없이 증명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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