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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국 남성, 정확하게 말해 '한국 남성성'에 대한 논의는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정희진 외 5명, 교양인, 2017) 에 기반하고 있다. <한국남자>(그러니까 '한남')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쓴 최태섭씨의 저작도 그렇고, 반지성주의를 키워드로 삼아 남성성을 다룬 이라영씨의 저작도 이 책의 자장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읽어보면 학술적 논의라서 딜레탕트가 왈가왈부할 거리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다룬 다른 논문을 참조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일단 오혜진 선생의 논문 <식민지 남성성은 무엇의 이름인가>(황해문화 96호)를 들춰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과 별도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심히 의심스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정희진씨의 다음과 같은 테제가 그랬다. "젠더가(는) 적대를 전제로 하는 권력관계"라는 것.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분에서 시작된다는 슈미트의 명제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치는 인간의 증오에서 생겨나고, 종족의 적은 자연이 선택했으며, 우리의 숙명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죽는 것이라는 적대의 명제가 젠더의 언어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적은 젠더로 나뉘고 남자와 여자는 그 숙명에 따라 서로 죽이고 죽어야 할 것이다.
정희진의 테제가 정확하게 그걸 의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그러나 적은 교육시켜 교화시키지 않는다는 정희진의 주장으로 볼 때, 높은 확률로 그걸 의미하지 않았나 한다.) 상당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이런 세계관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적자생존의 풍경을 그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젠더에 최우선권을 부여하고 타겟을 선정하여 배제 또는 공격하려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된 지금(얼마전에는 여성동문의 이익을 위해 5.18 학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을 욕보이는 망언을 비판하지 말라고 집단행동을 하기까지 했다.), 이제 그 테제가 현실화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타자를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자유주의/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인권을 설정하고 그로 인한 정치적 원칙들을 재확인하게 된 우리에게 이러한 테제가 적절한 것인지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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