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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침에 <<한나 아렌트 - 세 번의 탈출>>을 읽었다. 총평하면 아렌트 독자가 좋아할 그래픽 노블이자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렌트 독자가 아니라면 좋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이 아렌트 독자를 겨냥한 책이라는 건 제목에서 드러난다. <<한나 아렌트 - 세 번의 탈출>> 이라는 평이한 제목은 어떻게 아렌트 독자를 낚는가? 바로 '세 번의 탈출', 즉 아렌트에게는 세 번째 탈출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아렌트의 탈출은 두 번뿐이었다. 대학 졸업 후 독일에서 프랑스로 탈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탈출. 아렌트 탈출은 두 번뿐이다. 세 번째 탈출은 무엇일까? 이것이 책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지점이고, 정확하게 자신의 독자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 팬덤북이다.

책의 요약이나 세세한 논평은 피하겠고, ("학자의 삶이란 흥미로울게 거의 없다.") 한 가지 포인트만 이야기하자. 이 책의 장점이라면 딱딱하게 활자화되어 있는 아렌트의 삶과 시대를 '풍경'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건조하게 설명되어 있는 한 줄 한 줄의 문장이 그래픽으로 바뀌어 어떤 풍경으로 되살아나는지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벤야민을 아렌트가 어떻게 보았는지, 아렌트가 숨쉰 유럽의 공기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풍경에 덧붙여지는 아렌트의 말은 이론의 건조함을 넘어 실존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책은 놀랍도록 풍부한 인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점이다. 아렌트를 읽지 않은 독자, 아렌트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모르는 독자에게 이 책은 낯선 풍경만 남긴다. 그들에게는 아렌트의 말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경함 속에서는 생생함이 살아날 수 없다. 결국 아렌트 독자만이 풍성함을 전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렌트를 전형적인 자유주의 사상가로 그려내는 것도 약간은 불만이다. 아렌트의 이론이 하이데거를 뒤집은 듯한 모습을 취하고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이데거와 완전히 절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실존을 문제삼으며 이론을 전개해가는 아렌트의 방식은 넓게 보아 하이데거의 자장안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나타나는 아렌트의 모습은 하이데거와 완전히 절연하여 새롭게 이론을 구성한 자유주의 사상가의 모습이며, 제도적, 절차적 개선을 중요시하는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솔직히, 아렌트보다는 벌린과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려나, 아렌트 독자들이라면 환호할만한 그래픽 노블이다. 아렌트 독자라면 구입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렌트에 입문하기 위해서라든가, 하이데거라는 억압적(?) 남자로부터 굳건하게 독립하여 우뚝 선 여성 사상가의 모습을 보고 싶은 여성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 책은 아렌트 독자를 위한 팬덤북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평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과 별도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에필로그 마지막 장이었다. 아래에 첨부한다. 마지막 한 문장만 제외하면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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