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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도 아닌)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보고 있으면 꽤나 얄밉다. 소련의 해체 이후, 역사는 끝났다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민주정)를 무지막지하게 들이대면서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전세계에 고통을 강제했던 미국이, 이명박도 503도 아닌 트럼프 당선 이후에야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위선도 저런 위선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아무려나.


이 계보 중 근래에 소개된 저작으로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민주주의라는 마법에서 벗어나라>>를 들 수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책은 뜻밖에도 티머시 스나이더의 <<폭정>>. 나치시대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역사학자의 저작이라 그런지 두려움이 지나치다고 할까.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파시즘으로 내달았던 역사를 환기시키면서 민주주의가 지극히 약한 체제이며, 조금만 신경쓰지 않으면 붕괴될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최근에 이 계보를 이어받은 건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모순을 바탕으로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논한 저작인데, 결론은 비슷하다. 민주주의는 이데아를 구현할 수 없다는 것. 시민들의 참여와 적극적 계몽 없이는 최악의 체제가 될 수 있다는 의도를 언뜻언뜻 내비친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지식인은 민주정에서 자신의 위치나 판단을 과도하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이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계몽/교양의 열망에 시달리는 것도 그 중 하나. 그리고 이 모든 판단 뒤에는 진리의 순간을 발견하고 싶은 플라톤의 욕망이 숨어있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국가>>의 현대적 버전에 불과하다고 해도 좋을만큼 비슷비슷하다.


반면, 이런 경향 속에서도 나름의 균형을 잃지 않는 책이 있다. 최근에 발간된 데이비드 런시먼의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 제1차 세계대전부터 트럼프까지>> (박광호 역, 후마니타스. 2018). 이론적 논의보단 역사적 과정을 훑으면서 민주주의는 최악의 체제인데도 왜 21세기에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는가?를 논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민주주의를 상찬하는 책은 아니다. 실은 반대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민주주의란, 단기적 전망, 근시안적 행위,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머는 한심한 체제이기는 하나, 적응력이 뛰어나서 위기를 그럭저럭 넘긴다는 것. 물론 근본적 해결을 추구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 그 때문에 '항상'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건너뛰며, '간신히 현상유지'하는 체제라는 것. 요컨데, 최악의 체제이기는 하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러고 살 수 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읽으면, 민주주의가 헤게모니를 쥔 과정은 일련의 운이 작용한 결과이며, 현대라는 시대조건이 만들어낸 한계에서 체제가 우연히 선택된 결과일 뿐, 내재적 필연성 따위는 없다는 시니컬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존 그레이가 이 책을 호평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이론적인 우월함 때문에 헤게모니를 쥔 게 아니라, 전체주의와의 경쟁에서 우연히 승리했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쥐었다는 (이론가들은 허탈해 할) 아수라장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덧붙이자면 민주주의 체제는 특성상 교양이 가득찬 시민을 육성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이것이 주는 교훈이라면, 한국사회를 미개라고 규정하고 계몽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 사회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일까? 나는 대체로 그럴 거라고 본다.)


존 던의 책은 빡빡하고, 스나이더의 책은 공포를 조장하며, 뭉크의 책은 위선의 냄새가 난다. 그나마 영국 저자의 역사적 작업이 균형을 잡아준다.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귀찮은 독자들은 생각없이 읽어도 좋다. (그래도 재밌다.) 이달의 책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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