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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삶에 대한 짧은 메모

빵가게제빵사 2018. 3. 8. 14:31

- 틈날 때 조금씩 들춰보고 있는 책 중 하나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이다. 본론에 앞서 사담부터 곁들이자면, 이 분이 20세기 정치철학의 대가이며, 그가 쓴 글이 정치를 바라보는 명쾌한 틀을 제시해준다는 점을 십분 고려해도 나는 도통 이 분이 좋지 않고, 앞으로도 좋아질 것 같지 않다. 정치철학의 위대한 형태는 덕의 완성을 기준으로 각 정치체를 비교평가한 고전 정치철학이며, 안전하고도 배부른 돼지가 될 권리를 추구하는 근대정치철학은 저열하다고 평가하는 이 분의 목소리가 늘 의심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호오를 떠나 배울점도 많아서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 두고 싶다. 오늘은 '정치적 삶'에 대해서 메모.


- '정치적 삶'은 '정치적인 것에 헌신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책에서 아주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구절에나 나오는 부분을 종합해보면, 스트라우스의 용어로 레짐,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체제 또는 시스템이다.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용어를 풀어보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의 번역어, 즉 Form of City, 도시국가의 형식이다. 다시말해 한 국가를 이루는 형식적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가장 근접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정치체제' 정도다. 정리하면, 정치적 삶이란, '정치체제'에 헌신하는 삶을 뜻한다. (본래는 '체제'라는 용어가 좀 더 적당한데, 이 용어를 쓰면 정치/경제/문화를 포괄하는 단위로서의 '사회'를 의미하게 되어 스트라우스가 의도한 것에서 벗어난다. 스트라우스의 레짐은 다소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에 한정되어 있고, 조금 더 넓게 포괄한다면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정도에 해당하지, 관습과 문화에까지 확장하는 건 아닐것이다. 물론 그 경계가 늘 모호한 것이 사실이고, 상대적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어서 종국에는 루만이 의도한 사회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완고하다. 게다가 그는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는 사회학을 늘 경멸하듯이 말하고 있어서 그의 레짐을 '사회'로 환원시키면 완전한 오류라고 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경계가 어떻게 정확하게 그어지는지에 대한 대답을 한 바는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두 부류 뿐이다. 하나는 정치가다. 다른 하나는 정치이론가 또는 정치철학자다. 정치에 뛰어들어 실천을 감행하는 자는 정치가다. 한편 현 정치제가 적절한지, 또는 어떤 정치가가 실천하려는 행위가 어떤 의미이며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판별하려는 사람이 정치이론가/정치철학자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정치가의 목표는 공동선이다. 공동선이란 현 정치체를 유지시키거나, 수정,변화시키거나 또는 정치체 자체를 혁명할 수 있는 비전이다. 그리고 그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어 악마적인 힘과 싸우며 투쟁한다. 반면 정치이론가/철학자는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현 정치체나 정치가의 공동선을 분석하고, 이 분석에 좋음/나쁨을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다시말해 정치적인 것에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판별 기준은 '좋음/나쁨'이지 엄격한 의미에서의 '옳음/그름'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선 정치적인 것의 특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활동에는 현재상태를 유지하거나 변화시켜려는 두 가지 활동밖에는 없는데, 이 둘 다 어떤 '좋음'을 기준으로 이렇게 행동한다. 보수주의자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하에 그렇게 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은 바뀌어야만 좋아질 거란 판단하에 그렇게 한다. 둘 다 엄격한 의미에서 '옳음'이란 기준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정당성의 판단이 고려되어 '옳음'이란 관념이 첨가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옳음보다는 좀 더 넓거나 조절 가능한 '좋음'이란 기준에서 정치적 행위를 실천한다.  그러므로 정치이론가는 '정치적인 것'을 '좋음'을 기준으로 가치판단하는 사람이다. 정치적 삶은 이 두 가지를 뜻하며, 그 외에 다른 방식의 정치적 삶이란 없다.


- 그렇다면, 정치적 삶의 한계, 경계가 어느정도 그어진다. 정치가가 추구하는 것은 공동선이다. 그러므로 1) 그는 사익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어떤 정치가의 공동선이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사익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공동선이 될 수 없으며, 정치가라고 볼 수도 없다. 2) 정치가의 공동선은 정치체제의 무언가와 연관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인 관습/제도/법을 유지, 변화시키는 활동으로 귀결되어야 하지,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겠다거나 정체가 불분명한 문화를 혁신하겠다든가, 무의식적 기제를 문제삼는 형태의 활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3) 정치가의 활동은 기준에 의해 명확하게 판별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정치이론가/철학자의 경우, 1) 정치적인 것을 분석할 수 있는 명료한 분석틀을 확립해야 하고 2) 정치적인 것을 판별할 수 있는 '좋음/나쁨'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3) 정치철학자의 활동은 정치체제와 정치가의 공동선에 대한 분석과 가치판단으로 한정되어야지 정치에 섯부르게 참여하거나 범위를 벗어난 이론을 개진해놓고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여기에는 이론철학을 함부로 정치적 상황에 대입하거나 사회학 분석틀을 함부로 정치에 적용해 분석을 내놓은 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재정의하는 이론적 남용도 포함된다. 이 정도를 정치적 삶의 한계, 또는 정치적인 삶의 고유성으로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정리해보면, 스트라우스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의 분할이 (산뜻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전제내에서 작업한 듯 싶다. 당연히 여기에는 반론이 따르며,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모호함은 더 가중될 것이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정치학 또는 정치철학의 범위는 효율적으로 그어지는게 아닌가 한다. 아울러 이 정도의 틀만 가지고 있어도 스트라우스의 입자을 이해하는데에는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정치 관련서를 읽다보니 그의 이름이 너무 자주 언급되어 부족하나마 뒤적거려볼 수 밖에 없지만, 그리고 그 명료함에 감탄도 하게 되지만, 글쎄,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지적 충격이라고 하기는. 아무려나 다음 책은 <<자연권과 역사>>를 봐야 하는데, 이 책은 또 어디서 구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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