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불편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인간 본성을 거스른다. 인간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믿는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가족, 내 앞에 놓인 음식, 안부 문자를 보낸 친구의 신뢰, 내일도 해가 뜰거라는 확신, 어제와 같은 일상이 오늘도 반복되리라는 예상. 이것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사실을 믿음으로 바꾸고 의심을 주입하는 것이다. 온건한(?) 회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신뢰, 삶을 이끌어 온 원칙, 사회적 규칙과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규칙과 원리는 행위와 선택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의심은 의심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과 선택의 기준을 망실한 적막에 놓이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가 끝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
‘잉여’의 시대다. 서점에는 와 가 꽂혀있고, 극장에는 와 이 상영 중이다. 블로그에는 ‘잉여’가 흩뿌려져 있고, SNS에서는 표준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잉여는 유희도, 유행도 아니다. 그것은 밀려나는 사람들을 자조적으로 지시하는 단어다.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제시된 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얻을 수 있다. 하우스 푸어로 분류되는 사람이 300만 명이다. 빚을 갚지 못해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파산자는 10만이며 신청자는 계속 늘고 있다. 가계 대출은 천조에 이른다. 40세 중반에 회사에서 내팽겨져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 중 70%가 폐업신고를 한다. 75세 이상 노인의 49.3%가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불안한 현실을 지탱해 줄 사회적 유대감은 OECD 최하위에 속하고, 음주자..
올리비아 비앙키의 (올리비아 비앙키, 에두아르 바리보, , 김동훈 역, 열린책들, 2014)은 추상성을 제거하고, 헤겔에게 피와 살을 되찾아 주려는 시도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을 가급적 덜 인용하면서, 과 를 뼈대로 삼아 역사를 실현하는 주체의 여정을 조망한다. 저자의 의도는 찾기 어렵지 않다. 첫 페이지만 넘겨도 독자는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된다.“…헤겔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개념들을 고안해 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사상가였다. 생전에 헤겔은 자신이 철학자이기 이전에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본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살과 피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p15, 강조 인용자)그렇다..
한 해를 끝내며 책을 고른다. 언제부터인가 ‘올해의 책’ 같은 것이 별 의미가 없어졌는데, 올해의 책으로 뽑히는 리스트들이 ‘올해의 책’ 기준에 함량미달하기 때문이다. 올해의 책이란 1) 높은 판매고나 크게 주목받은 도서에서 2) 근래 가장 첨예했던 의제를 다루거나 현재의 난관을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어야 한다. 올해 그런 책이 없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세월호 이슈부터 표절문제까지 책은 발빠르게 나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근 10년 가까이 (혹은 그보다 더 넓게) 진행된 ‘공적영역의 붕괴와 한국사회의 명백한 퇴행’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떤 답도, 정면대결하려는 의지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상투적으로 말한다. “분노해라” 간단히 말해, 87년 6월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라는 것..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역, 위즈덤하우스, 2011) 은 ‘지적 생활자’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일련의 조언(정확하게는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다. 길지만 전체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1) 지적 정직을 지켜라.2) 지적 만족감을 찾아라. 지적 만족감을 찾기 위해 (가능하다면) 유학까지 감행해라.3) 반복해 읽어라.4) 형편이 허용하는 대로 매번 책을 사라.5) 책을 보관한 공간을 마련하라.6) 서재를 쾌적하게 유지하라. 7) 스크랩이나 메모노트를 만들지 말고, 책에다 직접 적어라.8)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계적으로 쓰라.9) 영감이 떠올랐을 때 바로 써라.10) 배움의 자세로 20년 이상 정리노트를 만들다보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다.11) 지적 생산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라.12) 고혈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