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막스 베버, 박상훈 역, 후마니타스, 2013)를 다시 읽었다. 새로 구한 책을 다시 읽는다고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인연이 길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김진욱 번역본(범우사)을 읽었고, 졸업하고 나서는 이상율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었으며, 몇 년 전에는 전성우 번역본(나남)을 구해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박상훈 번역본으로 읽었으니 횟수로만 치면 네 번째가 된다. 왜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대자면 어떤 구절에 공명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독일의 모든 정당이 보여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은 향후 정당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가야 할지 또 아직 어떤 가..
을 읽었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겸손함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루면서도 고전적 해석을 내걸지 않고, 획기적 해석을 시도하지 않으며, 소설이 은유하는 삶을 과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입에 넣고 굴리는 생율같다고 할 수 있다.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삼킨 후에 잔향이 입에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떠오르고 음미하게 된다. 그런 책이다. 나는 이 책이 문체나 사고, 진행방식의 특출함으로 어필하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체/사고/진행방식 모두 평이하다. 오히려 이 책은 자신의 장점, 그러니까 겸손함의 매력을 다른 곳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조합이다. 오늘은 이걸 이야기해 보자. 그러기 위해 나는 12장 를 고르겠다. 에는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하나, 범용한 독자와 저..
개정판 (마크 릴라, 서유경 옮김, 필로소픽, 2018)을 읽었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하이데거부터 데리다까지, 철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든 20세기 지식인의 삶을 검토하며, 진리의 열정을 전제정치의 불쏘시개로 타락시키는 지식인의 불장난을 명쾌하지만 오싹하게 묘사한다.' 물론 완벽한 소개는 아니다. 철학이 정치와 결합하며 전제의 도구로 타락하는 필연성과 교훈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가르침을 덧붙이면 이렇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자(지식인)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지 않은 채 신중함 없이 정치에 뛰어들어선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시라쿠사의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가 지닌 속성을 추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을 논..
(주디스 리치 해리스, , 최수근 역, 이김 출판사, 2017)을 읽었다. 읽고 나서 관련 서평을 훑어보았는데, 대개가 육아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쓴 평이한 서평이고, 심리학자나 발달심리학 관계자가 쓴 적절한 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보기에, “양육 가설”로 지칭된 발달심리학 이론을 반박하는 이 기념비적인 책은 지금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전문성을 가진 필자에 의해 꼼꼼하게 독해되고 평가될 필요가 있다. 만약 과학이 데이터에 입각하여 이론을 검증/수정하는 활동이라면, 경우에 따라 데이터가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과감히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설계하는 활동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양육가설이 매우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고, 어떤 데이터도 가설을..
들뢰즈는 세계를 특정한 흐름이 자각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는데, '지속'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으면 레비나스의 '있음' 개념과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다. 레비나스의 '영원'은 시작과 종말이 제거된 '현재'의 무한적인 지속인데, 이 지속의 경험이 바로 '있음'이다. 레비나스의 예를 쫓아간다면 불면증의 경험이 이것에 해당한다. 불면증은 소위 '잠드려고 하는 상태'다. 잠들려고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잠'이라는 어떤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거기엔 시간개념이 없다. 단지 '잠'이라는 어떤 상태를 몽롱하게 의식하는 것만이 끊없이 이어지는 일종의 반-능동/반-수동의 경험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힘의 장'이라고 부른다. '있음'은 하이데거가 묘사하는 존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