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수양에 관한 글을 찾아보다가, 생각이 나서 의 미셸 푸코편(p164~184)을 뒤적뒤척했다. 새삼 느끼는 것은 저자 마크릴라의 신랄함인데, 는 유난하다. 다른 에세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강렬한 데리다편과 비교해도 비판의 어조가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무엇이 이 세기의 사상가를 신랄하게 평하도록 만든 걸까. 좀 의아하기도 하다. 외형적으로, 는 제임스 밀러의 에 대한 독후감이다. 하지만, 저자 마크 릴라는 제임스 밀러가 그린 푸코의 모습에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여 좀 더 신랄한 평을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제임스 밀러가 그린 푸코가 "자신이 이해한 행복을 고집스럽게 추구한 고귀하고 독립된 정신의 소유자"이자, "관습에 도전해야 한다는 지적인 강박에 사로잡혀 급기야 죽음과 위험한 춤을 추"(p165..
들뢰즈는 세계를 특정한 흐름이 자각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는데, '지속'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으면 레비나스의 '있음' 개념과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다. 레비나스의 '영원'은 시작과 종말이 제거된 '현재'의 무한적인 지속인데, 이 지속의 경험이 바로 '있음'이다. 레비나스의 예를 쫓아간다면 불면증의 경험이 이것에 해당한다. 불면증은 소위 '잠드려고 하는 상태'다. 잠들려고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잠'이라는 어떤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거기엔 시간개념이 없다. 단지 '잠'이라는 어떤 상태를 몽롱하게 의식하는 것만이 끊없이 이어지는 일종의 반-능동/반-수동의 경험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힘의 장'이라고 부른다. '있음'은 하이데거가 묘사하는 존재자..
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불편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인간 본성을 거스른다. 인간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믿는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가족, 내 앞에 놓인 음식, 안부 문자를 보낸 친구의 신뢰, 내일도 해가 뜰거라는 확신, 어제와 같은 일상이 오늘도 반복되리라는 예상. 이것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되는 건 사실을 믿음으로 바꾸고 의심을 주입하는 것이다. 온건한(?) 회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신뢰, 삶을 이끌어 온 원칙, 사회적 규칙과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규칙과 원리는 행위와 선택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의심은 의심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과 선택의 기준을 망실한 적막에 놓이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가 끝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2)희랍에서 생성된 정치가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적극적 관여였다면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는 정치가 통치로, 시민의 참여가 복종으로 변질되는 역사적 굴곡을 보여준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고전 정치사상의 실종이다. 이는 폴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사상이 제국의 확장된 공간에서 적응력을 상실한 것이 이유였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자.(희랍의 자살로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크게 약화시켰고, 도시 국가 전체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 북쪽 지역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희랍지역을 점령, 나아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이 때를 헬레니즘 시대로 부른다. 이 시기에 희랍의 정치와 고전 정치사상은 심각한 위험을 맞이한다.마케도니..
어떤 이유로 셀던 월린의 을 뼈대삼아 희랍부터 홉스까지의 ‘정치’ 를 간략하게 정리해 둔다.희랍의 정치.(1)정치는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 하여 참조할만한 저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의 공동체 즉 Polis를 코이노니아 폴리티케(koinonia politike)라고 부른다. 코이노니아는 ‘결사체/공동체'로 번역되는 말이며, 폴리티케는 '폴리스의/폴리스적'으로 번역된다. 합치면 '폴리스적 공동체'가 된다. 이때 정치는 폴리스적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고, 행위하고,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정치란 제도나 공적영역의 업무가 아니다. 인민의 어떤 상태다.)그런데 폴리스적 결사체에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예을 떠올려보자. 우선 시계를 꺼꾸로 돌린다..
‘잉여’의 시대다. 서점에는 와 가 꽂혀있고, 극장에는 와 이 상영 중이다. 블로그에는 ‘잉여’가 흩뿌려져 있고, SNS에서는 표준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잉여는 유희도, 유행도 아니다. 그것은 밀려나는 사람들을 자조적으로 지시하는 단어다.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제시된 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얻을 수 있다. 하우스 푸어로 분류되는 사람이 300만 명이다. 빚을 갚지 못해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파산자는 10만이며 신청자는 계속 늘고 있다. 가계 대출은 천조에 이른다. 40세 중반에 회사에서 내팽겨져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 중 70%가 폐업신고를 한다. 75세 이상 노인의 49.3%가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불안한 현실을 지탱해 줄 사회적 유대감은 OECD 최하위에 속하고, 음주자..
올리비아 비앙키의 (올리비아 비앙키, 에두아르 바리보, , 김동훈 역, 열린책들, 2014)은 추상성을 제거하고, 헤겔에게 피와 살을 되찾아 주려는 시도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을 가급적 덜 인용하면서, 과 를 뼈대로 삼아 역사를 실현하는 주체의 여정을 조망한다. 저자의 의도는 찾기 어렵지 않다. 첫 페이지만 넘겨도 독자는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된다.“…헤겔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개념들을 고안해 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사상가였다. 생전에 헤겔은 자신이 철학자이기 이전에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본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살과 피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p15, 강조 인용자)그렇다..
침대에 누워 (한나 아렌트, 윤철희 역, 마음산책, 2016)을 읽었다.('해나 아렌트의 말'로 출간되지 않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수록된 네편의 인터뷰 중 두 편은 이미 접한 바 있고, 다른 두 편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나는 텍스트에서 출간된 에, 다른 하나는 한길사에서 출간된에 실려 있다. 물론 번역은 다르다.- 읽으면서 새삼 확인한 것은 한나 아렌트의 매력이다. 그녀의 매력은 치밀한 이론화에 있지 않다. 그녀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들을 낯설게 만들면서 적확한 논평을 바늘 찌르듯 구사한다. 가령 "이봐요... 우리의 총체적인 신화는, 또는 우리의 총체적인 전통은 악마를 타락 천사로 봐요. 타락 천사는 당연히 늘 천사로 남아 있는 천사보다 훨씬 더 흥미로워요. 후자는 우리에게 좋은 이야..
한 해를 끝내며 책을 고른다. 언제부터인가 ‘올해의 책’ 같은 것이 별 의미가 없어졌는데, 올해의 책으로 뽑히는 리스트들이 ‘올해의 책’ 기준에 함량미달하기 때문이다. 올해의 책이란 1) 높은 판매고나 크게 주목받은 도서에서 2) 근래 가장 첨예했던 의제를 다루거나 현재의 난관을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어야 한다. 올해 그런 책이 없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세월호 이슈부터 표절문제까지 책은 발빠르게 나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근 10년 가까이 (혹은 그보다 더 넓게) 진행된 ‘공적영역의 붕괴와 한국사회의 명백한 퇴행’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떤 답도, 정면대결하려는 의지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상투적으로 말한다. “분노해라” 간단히 말해, 87년 6월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라는 것..
Hannah Arendt (1906.10.14 ~ 1975.12.4) 철학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라지만 그런 일반론이 성립되지 않는 철학자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나 아렌트가 그렇다. 스승이었으며 한때는 연인이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렌트에게는 죽음의 음습한 그림자가 전혀 어른거리지 않는다. 그녀는 시작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논했고, 죽음을 넘어 어떻게 새롭게 '탄생'할 것인지를 궁구했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제거된 것도 치워진 것도 아니었으며 극복의 대상도 순응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되어야 할 것이었으며, 주의깊게 마주하며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죽음과 여러번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그녀는 새로이 시작하는 인간의 가능성과 탄생의 기..